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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보수, 진정한 진보

“뭔가 이상해요. 왜 보수가 진보적인 것 같고, 진보가 보수적인 것 같죠?”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서른여섯의 당대표가 선출된 것이 의아했나보다. 그 친구만 그럴까? 이 일 에 대해 헌정 이래 가장 파격적인 일이라며 크고 작은 매체에서 연일 보도한다. 그만큼이나 서른여섯의 젊은 당 대표 선출은 센세이션이었나보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센세이셔널했던 것은 ‘젊은 당 대표’가 아니라 ‘젊은 보수정당 대표’였다. 대표적인 거대 보수정당의 대표. 생각해보면 이것은 의아함을 너머 놀랄만한 일이다.    


 보수保守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는 것이다. 진보進步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흔히, ‘국민의힘’을 보수정당이라고 하고, ‘더불어민주당’을 진보정당이라고 한다. 분명 ‘국민의힘’은 보수적이고, ‘더불어민주당’은 진보적인 면이 있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옛것을 지키려하고, 한국의 ‘진보정당’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종종 한국의 ‘보수정당’은 진보적이었고, 한국의 ‘진보정당’은 보수적이었다. (보수정당의 파격적인 경제민주화 공약. 진보정당의 성소수자를 대하는 꼰대적인 태도 등등.) 구체적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수도 있겠으나, 한국의 ‘보수정당’의 당명이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면 대표적인 ‘진보정당’은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와 있다. 보수정당의 30대 당대표도 얼마나 진보적인가. 한국의 '보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진보정당보다 더 파격적인 진보성을 보여준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보수가 아니고, 한국의 ‘진보정당’은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보수정당은 보수라는 착시가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한국의 보수정당도 어떤 경우에도 악착같이 유지하려는 것이 있기는 있기 때문이다. 그네들의 기득권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어떤 경우에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한다. 그것을 지키려는 모습에서 보수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것은 보수가 아니다. 


 진정한 보수란 무엇인가? 어려울 것 없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가장 나중에 돌아오는 장수이다. 진정한 보수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이념 혹은 명예 등등)가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진정한 보수가 보여주는 우아함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에 그런 우아함이 있을까? 그들은 적진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나중에 나오는 장수이기보다, 적진에 가장 나중에 들어가고 가장 먼저 나오려는 장수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악착같이 지키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진보적인 일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파격적인 30대의 젊은 당대표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30대의 당대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선택한 카드 일뿐이다. 거기에 더 나은 사회를 열망하는 진보성 따위는 없다. 거기에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할 명예와 이념 같은 보수성 따위도 없다. 대부분의 한국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야만'에 가깝다.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보수적 가치마저 버리는, 동시에 진보보다 더 진보적이 되는 야만. 먹이가 있을 것 같은 피 냄새가 있는 곳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야만. 힘의 논리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야만. 필요하면 인간적인 눈물마저 날조하는 야만. 결국은 강자의 논리로 약자를 억압하려는 야만. 그것이 한국 보수의 맨얼굴이다.      

 

 30대 당 대표는 한국 정치의 발전인가? 그런 측면이 있겠다. 어찌되었든 세대교체는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더 위험하다. 새로운 야만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로 포장된 보수의 탄생에서 새로운 야만의 냄새를 맡은 것은 예민한 철학자의 기우일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치를 통해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논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우아한 보수는 어디 있는가?” 그리고 “진정한 진보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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