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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편해 하는 '당신'에게

“넌 좀 불편해” 


세상 사람들에게 참 많이도 들었던 이야기였어요. 알고 있어요. 내 말이, 내 생각이, 내 삶의 방식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것을요. 저라는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불편함이었던 거죠.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당황했고, 나중에는 분노했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삶을 이렇게 산다.”라고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는 것에 화가 났죠. 


 이유 없이 불편한 존재가 된 저를 인정하는 것은 너무 큰 슬픔이었어요. 그것이 제가 점점 혼자가 되어갔던 이유일 거예요. 하지만 혼자였던 시간은 슬픔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시간은 제게 축복이었어요. 저는 혼자인 시간 동안 억울하고 분노하는 제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저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을 보았어요. 그 시간 덕분에 제 존재를 불편해 하는 이들 앞에서도 당황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게 되었으니까요. 


 위축과 무책임. 이것이 우리네 삶에서 가장 피해야 할 두 가지 마음일 거예요. 돌아보니, 저라는 존재를 불편해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위축과 무책임 사이에 방황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저는 각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죠. 그리고 어려움에도 변명하지 않고 삶을 헤쳐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죠. 그런 저를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는 자신이 처한 삶의 문제가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위축되었을 테죠. 그 위축감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늘 말했죠. “그건 네가 그럴만한 상황(사람)이어서 그런 거야” 


 그렇게 그네들은 저와 자신의 다른 조건들을 집요하게 찾아내려 했죠.  그네들이 처한 곤경에, 그리고 그 곤경을 헤쳐 나가지 못하는 이유에 자신의 몫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죠. 그들은 위축감을 벗어나기 위해 무책임을 선택한 셈이었죠. 그렇게 그들은 위축감과 무책임 사이에서 긴 시간 방황하고 있었죠. 


 종종 '당신'과 그들이 겹쳐 보일 때가 있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마음 깊이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제 존재를 보이려는 이유를 헤아려주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삶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당신’과 ‘우리’를 위해서 이야기 하려는 거예요. ‘당신’이 조금 더 기쁜 삶을 살기를 바라요. 위축과 무책임을 오가는 삶은 슬퍼요. 저는 누구보다 이 깊은 슬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슬픈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 이 이야기는 ‘우리’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저는 알고 있어요. 저라는 존재 자체가 불편함이 되는 사람과는 서로 슬픔을 주는 관계밖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요. 


 저는 ‘당신’과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아요.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사이가 되고 싶어요. 이글이 ‘당신’에게 불편함으로 다가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자신의 상처 넘어 저의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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