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심타파

타인까지 힘들게 하는 결정 장애

“이제 그만 정리해.”

“어, 그래야지, 곧 정리할 거야”

“도대체 그 소리만 몇 번째야, 우유부단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어쩌겠냐.. 내가 원래 좀 소심하잖냐?”


‘종민’에게는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다. 하지만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가버렸다. ‘종민’은 여자 친구에게서 이미 마음이 떠났다고 종종 말했다. 이제 여자 친구와 데이트는 의무와 습관이 되어 버린 것 같다고. ‘종민’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하지는 말자. 사람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연인이 있는 상황에서 마음을 빼앗아가는 사람이 불현듯 등장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우발적인 사건이니까 말이다.


사랑의 우발적 속성을, ‘종민’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모종의 찜찜함이 남는다.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선택‧결정 장애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힘들게 만든다. 이런 식의 소심함은 더 큰 불행의 전주곡이다. 선택‧결정 장애로 인해 자신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도 문제지만 타인까지 불행한 삶으로 몰아넣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자신만을 괴롭히는 소심함이 작은 불행이라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마저 괴롭게 하는 소심함은 더 큰 불행이라 할 수 있다. ‘종민’은 자신의 소심함으로 인해 더 큰 불행을 초래했다.


고문 중에 기묘한 고문이 있다. ‘희망고문’이다. 여자 친구도 ‘종민’이 예전 같지 않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종민’이 의무와 습관으로 여자 친구를 만남으로써 그녀는 헛된 희망을 갖게 되었을 테다. ‘지금 잠시 바빠서 그런 걸 거야’ 그렇게 그녀는 불길한 직감을 애써 은폐했을 테다. 그녀는 아직 ‘종민’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얼마나 힘이 들까? 자신에게 마음이 떠났음을 직감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마치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그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속으로 ‘오늘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을 애써 눌러놓아야 할 테니까.

‘종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만나면 된다. 아니 만나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의미는 이미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종민’이 해야 할 몫이 하나 더 있다. 가급적 빨리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종민’은 그렇지 못했다. 이별을 말하지 못했다.


소심한 이들은 종종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배려로 합리화한다. ‘종민’도 그랬다. 여자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말로, 소심한 자신을 정당화했다. ‘종민’은 알고 있을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나타난 이후 여자 친구에게 유독 더 쌀쌀맞고 못되게 대했다는 사실을. 소심해서 이별을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행태다. 자신은 이별을 말할 수 없으니 상대방의 입에서 이별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겁하며 비루한가.


아픈 이야기는 어차피 아픈 이야기다. 한 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최대한 배려가 무엇인가? 최대한 빨리 단호하고 분명하게 이별을 말해주는 일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다 좋다. 자신은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고, 상대 역시 최대한 빨리 나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런 최소한 배려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비겁하고 무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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