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비하’라는 소심함
“이제 몇 년 째야? 이제 고백할 때도 됐잖아.”
“그건 그런데 어쩌겠어. 내가 원래 좀 소심하잖아.”
‘승화’는 몇 년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고백해야지, 고백해야지’ 마음 먹은지 벌써 몇 해가 지났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다. 보다 못한 친구의 다그침에 ‘승화’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내가 원래 좀 소심하잖아.” 여기서 우리는 소심함이 무엇인지 하나의 정의를 더할 수 있다. ‘승화’는 소심하다. 왜 그런가? 그녀에게 당당하게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이는 그리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진심을 전하는 고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 아무리 거칠 것이 없이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고백을 주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오히려 너무 쉽게 사랑을 고백하는 경박함이 소심함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밀도 높은 사랑의 상처를 피하려는 소심함 말이다. 그러니 고백을 주저했다는 것 자체가 소심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승화’는 왜 소심한 것일까?
바로 ‘자기비하’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를 만나보자. 스피노자는 서양철학을 논하면 빼놓을 수 없는 탁월했던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성찰했다. 그는 ‘자기비하’라는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기비하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하여 적정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스피노자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신에 대해 적정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 바로 자기비하다. ‘승화’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쉬이 고백하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은 소심함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원래 좀 소심하잖아.”라는 말은 소심함이다. 즉, 좋아하는 이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자신을 정당화하며 자신을 적정 이하로 깎아내리는 것은 소심함이다.
“내일은 고백해야지, 내일은 고백해야지” 이런 애태우는 마음은 소심함이 아니다. 애태우는 마음은 고백을 하려는 마음 때문에 발생한 마음이니까 말이다. 어떤 경우든,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한 걸음을 내디디려는 마음은 결코 소심함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소심해.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라며 그 애태우는 마음을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은 소심함이다. 이런 ‘자기비하’는 한걸음을 내디딜 마음 자체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자기비하’의 원인, ‘겸손’
이런 ‘자기비하’는 소심함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소심함은 왜 발생한 것일까? 스피노자는 ‘자기비하’는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하여 적정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즉, 자기비하의 원인은 ‘슬픔’이다. 그렇다면 자기비하를 만든 ‘슬픔’은 어떤 ‘슬픔’일까? 다시 스피노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겸손(위축감)이란 인간이 자신의 무능이나 무력함을 고찰하는 것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에티카』 스피노자
자기비하를 유발하는 슬픔에는 많은 종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중 단연 핵심적인 슬픔은 ‘겸손’이다. 스피노자의 ‘겸손’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겸양과 미덕의 긍정적인 의미의 겸손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겸손’은 부정적인 것이다. 자신의 단점이나 무능함만 반복해서 생각하면서 발생하는 슬픔이 바로 ‘겸손’이다. 스피노자의 ‘겸손humilitas’이 때로 ‘위축감’을 번역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승화’가 왜 자기비하라는 소심함에 빠져 있는지 알겠다. ‘승화’는 ‘겸손’하기 때문이다. ‘승화’는 매력적인 아이다. 클래식 음악을 잘 알고, 깊이 있는 소설과 영화에 대해 조예가 깊다. 하지만 ‘승화’는 그런 자신의 장점과 역량을 바라보지 않는다. 말주변이 없는, 운동 신경 없는, 수줍음은 많은 자신만을 반복해서 바라본다. 그래서 승화는 종종 ‘슬픔’에 빠져 있다. 바로 그 ‘슬픔’(겸손) 때문에, “자기에 대하여 적정 이하로 하찮게 여기(자기비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