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함에 머무르려는 소심함
‘소심함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답해왔다. 이제 소심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겸손으로 인한 자기비하. 이 역시 소심함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정의는 다른 소심함에 대한 정의와 같은 위상을 갖지 않는다. 이 소심함은 궁극의 소심함 혹은 최악의 소심함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궁극의, 최악의 소심함은 무엇일까?
“나는 원래 결정을 잘 못해” “나는 원래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야” “나는 원래 작은 위험에도 겁을 많이 내” “나는 원래 다른 사람 눈치 보는 사람이야” 바로 이것이 궁극의, 최악의 소심함이다. 누구나 소심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결정을 잘 못할 수 있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고, 작은 위험 앞에서 크게 겁이 날 수 있고, 타인의 눈치를 볼 수도 있다. 이것 모두 소심함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소심함이 있다.
바로 ‘소심함에 머무르려는 소심함’이다. 이 소심함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치명적인 소심함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소심함을 극복하려는 의지 없이 그 소심함을 무기력하게 인정하고 그곳에 계속 머무르려는 소심함. 그래서 우리네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소심함에 주저 앉아버리는 소심함. 이것이 궁극의, 최악의 소심함이다.
내 탓이 아닌 소심함, 내 탓인 소심함.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많은 소심함은 우리 탓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조건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소심해질 수 있다. 타인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사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부모, 왕따를 시켰던 학교 등등. 이런 삶의 조건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소심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소심함은 우리의 의지와 선택과 아무 상관없이 우리네 삶에 불쑥 들어와 버렸다. 그래서 이는 우리 탓이 아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우리 탓인 소심함이 있다.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들러붙은 소심함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소심함. 이는 우리 탓이다. 자신의 소심함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무기력하게 인정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는 소심함은 전적으로 우리 탓이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말이다. 자신에게 엄격해질 시간이다. “그래 나는 원래 소심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어.”라는 소심함은 전적으로 우리 잘못이다. 소심함에 고통 받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소심함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