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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r Nothing’ 이라는 소심함

화끈한 이들은 소심하지 않을까?

“할 거면 확실히 하고 안할 거면 아예 안 해!”     


 화끈한 사람들의 슬로건이다. 이런 사람들은 흔하다. 하루 종일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글 한자도 보지 않는 사람들.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거나 한 잔도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하거나 하루 종일 누워서 달고 짠 과자를 먹는 사람들. 이런 사람은 소심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할 땐 화끈하게 하고 안 할 때는 화끈하게 안 하니까 말이다. 이들은 우유부단하거나 우물쭈물 거리는 소심한 이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이들은 소심하지 않은 걸까? 아니다. 이들 역시 소심하다. 그것도 심각한 소심함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소심함일까? ‘All or Nothing’ 이라는 소심함이다. 화끈한 이들의 슬로건은 ‘전부(All) 아니면 전무(nothing)’다. 의아하다. 이것이 왜 소심함이란 말인가?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해 어떤 행동도 못하는 사람, 혹은 애매하게 결정해서 주춤거리며 행동하는 사람. 이런 이들이 소심한 사람 아닌가? ‘전부 아니면 전무’로 화끈하게 결단내리고 행동하는 사람이 왜 소심하다는 말인가?



 ‘All or Nothing’ 이라는 소심함


‘기찬’은 화끈하다. 연인이나 친구들에게 화끈하게 잘해준다. 연인이나 친구들이 원하는 것을 아낌없이 다 해준다. 그뿐인가? 약속에 늦거나 배려 없는 행동 등등. 크고 작은 서운할 법한 일에 대해서 일절 말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연인이나 친구들에게 마음이 떠나는 순간, 한 없이 차가워진다. 아니 그네들을 향한 일체의 관심을 꺼버린다. ‘기찬’은 늘 자랑하듯 말한다. “나는 좋아할 때는 전부를 주지만 마음 떠나면 끝이야!” ‘기찬’은 화끈하게 결단내리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기찬’은 소심하게 짝이 없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기찬’의 인간관계가 ‘All or Nothing’이기 때문이다. 좋아할 때는 전부를 주고, 마음을 떠났을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 그 사람이 소심한지 아닌지를 구별하기 어렵다. 당당하고 강건한 이들 역시 이런 삶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당당하고 강건한 이들은 좋아할 때 전부를 주고 마음이 떠나면 야속하리만치 냉정하게 떠난다. 당당한 이들과 ‘기찬’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이 질문이 중요하다. “왜 전부를 주느냐?”


 ‘기찬’은 왜 연인과 친구들에게 전부를 주려고 했을까?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행복을 느껴서?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마음이 있다. ‘기찬’은 그들을 떠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전부를 주려는 것이다. 이 기묘한 역설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기찬’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연인이나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연인이나 친구들이 자신에게 아무리 서운하게 해도 그것에 대해 표현하지 않고 참는다. 항상 화끈하게 잘해주려고 발버둥을 친다.


 다시 묻자. ‘기찬’은 왜 전부를 주려는 것일까? 자신이 지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연인과 친구들을 떠날 준비를 혼자 차곡차곡 하는 것이다. “나 이렇게 다 해줬어. 이제 됐지?” ‘기찬’은 연인‧친구들과 더 기쁜 시간을 더 오래 함께 하기 위해 ‘전부’를 주려는 게 아니다. 너무나 두려운 ‘전무’(혼자 남겨짐)인 상황을 준비하는 것이다. 소중한 이들과 함께 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남겨질 준비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혼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고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All or Nothing’은 자기파괴적인 상황을 준비하는 마음


‘기찬’의 화끈함, 즉 연인‧친구들에게 전부를 주려는 마음은 ‘혼자 남겨짐’이라는 두려운 상황을 정당화하려는 마음이다. ‘All or Nothing’라는 기찬의 마음은 이별이라는 자기파괴적인 상황을 준비하는 마음이다. 이별(혼자 남겨짐)이 두려워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해면서 까지 혼자 이별을 준비하는 ‘기찬’은 얼마나 소심한가? ‘All or Nothing’이라는 모든 마음이 그렇다. 그것은 자기파괴적인 상황이 두려워 스스로 그 상황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마음이다.


 왜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가? 잠시 딴 생각을 하면 하루 종일 놀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어떤 책도 보지 않는 자기파괴적인 지적 무기력의 상태를 준비하는 마음일 뿐이다. 왜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는가? 한 잔 들이키는 순간 계속 마시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몸도 마음도 망가질 자기파괴적인 폭음을 준비하는 마음일 뿐이다. 왜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하는가? 작은 군것질이라도 하는 순간 계속 먹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곧 몸도 마음도 망가질 자기파괴적인 폭식을 준비하는 마음일 뿐이다.


 ‘All or Nothing’이라는 마음의 방점은 ‘All’에 있지 않다. ‘Nothing’에 있다. ‘전부(All)’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전무(Nothing)’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 ‘전무(Nothing)’인 상태가 두려워 ‘전부(All)’로 도망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도망은 필연적으로 다시 ‘전무(Nothing)’로 되돌아오는 도망일 뿐이다. ‘전부(All)’는 언제나 모든 것을  소진시켜 ‘전무(Nothing)’로 귀결되니까 말이다. 무서운 것을 피해 도망가려는 모든 마음은 소심함일 뿐이다. 화끈함은 이렇게나 소심하다.


 소심한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해 어떤 행동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사람. 애매하게 결정해서 주춤거리며 행동하는 사람. ‘All or Nothing’으로 화끈하게 결단내리고 행동하는 사람. 역설적이게도 이들 중 화끈한 이들이 가장 소심하다. 죽음이 두려워 절벽을 외면하는 사람 혹은 죽음이 두려워 절벽 앞에서 주춤거리는 사람이 더 소심한가? 죽음이 두려워 절벽에서 뛰어내려버리려 준비하는 이들이 더 소심한가? 


 ‘All or Nothing’으로 사는 이들은, 두려운 대상 앞에서 가장 위축되어 있는 가장 소심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All or Nothing’ 삶의 태도를 가진 이들은 자신의 삶을 찬찬히 돌아볼 일이다. 전무인 상황이 두려워 전부로 도망친 것은 아니었는지. 그렇게 자기파괴적인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던 것은 아닌지. 화끈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찬찬히 돌아볼 일이다. “나는 심각하게 소심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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