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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어떻게 보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

복싱의 선순환, ‘쉐도우→메써드→스파링→시합’


복싱의 선순환, ‘쉐도우→메써드→스파링→시합’


다른 복싱 체육관도 비슷하겠지만, 내가 다닌 체육관에서 기량을 올리는 단계는 이렇다. ‘쉐도우→메써드→스파링→시합’ 쉐도우는 상대를 가정 한 후 거울을 보고 혼자 하는 훈련이다. 메써드는 실제 상대와 치고받지만 서로의 약속 하에 천천히 그리고 약한 강도로 진행하는 훈련이다. 스파링은 보호장구(일반적으로 헤드기어에 14온스 글러브 착용)를 갖춘 상태에서 실제 시합처럼 치고받는 훈련이다. 그리고 시합은 스파링에서 헤드기어를 벗고, 8온스(70kg 이상은 10온스) 끼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다. 


 쉐도우 하면서 익힌 기술이나 동작을 메써드에서 사용해보고, 그것이 익숙해지면 스파링에서 써먹어보고 그것에도 익숙해지면 시합에서도 능숙하게 자신의 기술이나 동작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건 나름 체계적인 훈련법이다. 복싱이라는 것이 진짜 싸움에 가깝다보니, 저 단계를 순차적으로 따르지 않고 훈련하면 (예컨대 쉐도우에서 바로 스파링으로 건너뛴다든지 하면) 긴장감 때문에 기량이 잘 늘지 않는다. 그 뿐이 아니다.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스파링이나 시합을 하게 되면 크고 작은 부상도 종종 발생한다.


 결국 기량 향상은 ‘쉐도우→메써드→스파링→시합’이라는 사이클의 선순환을 통해 이뤄진다. 쉐도우에서 익힌 것을 메써드와 스파링을 통해 상대 움직임에 맞춘 거리감과 타이밍 등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시합에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시합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쉐도우를 통해 다시 가다듬게 된다. 이 선순환을 통해 일류 복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쉐도우의 중요성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선순환의 시작점이 바로 쉐도우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거울을 보고 혼자서 자세나 연결동작을 가다듬는 쉐도우 훈련 없이 기량이 향상되는 법은 없다.



“형님은 상대가 자꾸만 순간 이동을 해요”

쉐도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였기에 훈련의 꽤 많은 시간을 쉐도우에 할애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링 위에서 열심히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었다. 관장님은 일반 회원 지도를 잠시 멈추고 한 동안 내 쉐도우 훈련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3분, 5라운드의 쉐도우를 끝내고 링에서 내려왔다. 쉐도우를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것에 칭찬을 해주는 거나 아니면 잘못된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샌드백을 치기위해 글러브를 끼고 있는 내게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형님은 상대가 자꾸만 순간 이동을 해요” ‘뭔소리야?’ 속으로 생각했다. 뒤이어 관장은 덧붙였다. “형님은 쉐도우할 때 잘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크게 틀어버려요. 그렇게 하려면 상대가 순간이동을 해야 되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쉐도우는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생생하게 그리면서 해야 하는 훈련이다. 그 상상 속의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나 역시 움직여야 하는 거였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게 훈련해야 메써드나 스파링 혹은 시합에서도 쉐도우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나는 그걸 하지 못했던 게다. 가상의 상대를 주시하기보다 내 자세가 어떨까, 내 움직임은 어떨까만 생각했던 게다.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자. 나는 ‘내 자세가 일반회원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내 움직임이 관장에게는 어떻게 보일까?’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작 내 눈앞에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가상의 상대는 외면한 채 말이다. 그러니 관장의 눈에는 쉐도우를 하는 내 상대가 순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걸게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 눈앞에 상대는 애초에 없었으니까.



‘어떻게 보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복싱에서 쉐도우는 중요하다. 쉐도우의 핵심은 ‘어떻게 보일까?’에서 벗어나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다. 실제로는 내 눈앞에 없지만, 마치 내 앞에 실재하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쉐도우를 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비결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어떻게 보일까?’를 떨쳐내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하긴 비단 쉐도우만 그럴까? 복싱이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스포츠다.


 룰이 있기는 하지만 복싱은 마주선 상대와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실전에 가깝다. 복싱은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의 연속이다. 시합은 물론이고 훈련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 복싱에 ‘어떻게 보일까?’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모든 세포를 동원해 온 감각을 깨워 ‘어떻게 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상대의 호흡, 작은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상대의 주먹이 내 몸과 얼굴로 날아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쉐도우를 하면서 내 상대가 순간 이동을 했던 건, 내가 진짜 복싱이 어떤 건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쉐도우를 하면서 상대가 순간 이동하는 일은 없어졌다. 언제 부터였을까? 그건 아마 몇 번의 스파링을 하면서 상대에게 신나게 얻어터져보면서였던 것 같다. 내가 쉐도우에서 ‘어떻게 보일까?’에 신경을 쓸 수 있었던 건, 진짜 복싱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스파링을 하면서 ‘이대로 맞다간 정말 큰일 나겠구나!’라는 느낌이 든 적이 몇 번 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 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가 뭐 중요한가?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절박한 상황의 경험이 몇 번 쌓이고 난 뒤로는 쉐도우할 때도 여유가 없어졌다. 쉐도우를 할 때 그 절박한 경험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상대가 이렇게 때리겠지? 내가 이렇게 공격하면 저렇게 피하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상대를 머릿속에 그리려고 하지 않아도 상대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쉐도우를 하면서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복싱은 절박한 것이고 절박함 앞에 ‘어떻게 보일까?’라는 허영이 들어설 자리는 애초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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