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8.허영을 걷어낸 만큼 행복이다.

허영은 실전을 통해 걷어낼 수 있다.

 ‘행복-허영-자기불신’은 한 세트다.

허영이란 게 뭔가? 사전적 의미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다. 결국 허영이란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어떻게 보일까?’라는 질문에 천착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허영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을까?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이성에게 관심 받기 위해, 직장에서 인정 받기위해, 친구에게 칭찬받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쉐도우를 잘못했던 이유도 결국은 허영 때문이다. 복싱을 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복싱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니까.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외제차에 집착하는 남자들, 명품가방이 없다고 우울해하는 여자들, 박사 학위에 집착하는 학생들, 금뺏지를 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꾼들. 그들은 행복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행복한 것처럼 보이고 싶은 것이다. 허영이다. 그들은 모두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대신 ‘나는 어떻게 보일까?’에 천착하는 사람들이다.



 ‘행복-허영-자기불신’은 한 세트다. 인간은 자기불신을 해소하기 전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이 자기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자기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의 바닥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어두운 면에 직면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유약하고 영악한 것이 인간이라, 인간은 허영을 발명했다. 자기불신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면서 행복하고자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허영은 자기 불신을 은폐하기 위한 필요 이상의 겉치레인 셈이다. 바로 행복을 날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허영은 치명적 유혹이다. 외제차·명품가방을 사고, 박사학위·금뺏지를 얻게 되면 안목 없는 몇몇의 관심·인정·칭찬을 얻을 수 있다. 바로 그 헛된 관심·인정·칭찬으로 행복을 날조하려는 것이 허영의 맨얼굴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허영의 끝에 행복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더 큰 자기불신과 그로 인해 더 깊어진 불안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화장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날까 더욱 불안해지는 어느 여인의 속내처럼 말이다. 매일 허영에 시달리는 우리네 삶을 생각해보면 참 서글픈 일이다.


  

허영을 걷어낸 만큼 행복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행복에 절대적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부류다. 차라리 ‘그래, 고된 세상살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허영이라도 부려야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외제차, 명품가방을 사서 행복 비슷한 감정이라도 느껴보려는 발버둥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박사학위를 받고 금뺏지를 달아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긍정해보려고 몸부림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런 발버둥과 몸부림마저 없다면, 그네들은 어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들을 비난하는 대신 응원해주고 싶다.


 하지만 복싱을 하면서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건 남 보기에 화려한 쉐도우 움직임으로 복싱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보다, 실제로 복싱을 잘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진짜 행복은 ‘나는 어떻게 보일까?’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허영을 걷어낸 만큼 진짜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복싱을 하면서 알게 된 삶의 진실이다.


 그렇다면 자기불신을 은폐하고 회피하게 만드는 허영은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까? 그건 실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에누리 없는 실전을 통해서만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전만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우리의 허영을 일거에 제거해준다. 복싱에서 실전이 스파링이나 시합이라면, 삶에서 실전은 실존적 결단이자 선택일 게다. 각자 삶 앞에 주어진 실존적 결단과 선택을 통해 우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게 된다.


허영은 실전을 통해 걷어낼 수 있다.


자신은 용기 있고 도전 정신 넘치는 사람이라고 백날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다. 스파링이나 시합을 피하고 있다면 그가 말한 용기와 도전 정신은 허영이다. 마찬가지로 입으로만 백날 사표를 쓰고 자신의 사업을 할 거라 외치는 월급쟁이의 용기와 도전 정신은 허영이다. 사표는 실존적 결단과 선택을 요구하는 실전이기 때문이다. 스파링과 시합이라는 실전이 주는 절박함을 경험하고서 허영에 가득찬 쉐도우를 할 수는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각자에게 주어진 실존적 결단과 선택이라는 실전에 물러서지 않을 때 허영이 자리 잡을 곳은 없다. 


 “프로 복싱 테스트만 가보세요. 쉐도우는 다들 파퀴아오예요.” 언젠가 관장이 했던 말이다. 농담처럼 건넨 이 이야기는 사실 너무나 무거운 이야기다. 얼마나 많은 복서들이 허영에 가득 찬 자세로 복싱을 시작하는지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복싱으로 삶을 돌아본다. 행복을 날조하고, 날조 그 가장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영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또 나는 얼마나 많은 실존적 결단과 선택을 피하며 살아왔던가. 얼마나 허영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던가.


 나는 링에서도 삶에서도 더 이상 실전을 피하며 살고 싶지 않다. 때로 아프고 절망스러울지라도 내가 얼마나 허접한 인간인지 피하지 않고 직면하고 싶다. 그래서 끝끝내는 ‘나는 어떻게 보일까?’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진짜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나는 복싱이 좋다. 복싱은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그 뿌리 깊은 허영을 단박에 걷어 내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7.‘어떻게 보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