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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프로 복서의 첫 관문, 프로테스트

돌발변수, 100kg 선수와 대결

프로 복서로 가기 위한 첫 관문, 프로테스트 

복싱을 시작하면서 이 운동의 끝을 분명히 정했다. 프로 데뷔다. 거기까지 가면 오래시간 나를 짓눌렀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생활체육으로 복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 시합을 하려면 일종의 자격증이 필요하다. 운전도 아무도 아무나 할 수 없듯이 프로 복싱 시합 역시 아무나 할 수가 없다. 무면허 운전이 위험하듯 아무런 준비 없는 프로 시합 역시 위험하기 때문이다. 달랑 8온스짜리 글러브 하나 끼고 상대와 치고받는 일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프로 시합을 하기 위해서는 테스트를 봐야 한다. 그걸 복싱하는 사람들은 ‘프로테스트’라고 한다. 그 테스트에 합격한 사람들에게만 협회에서 프로복서 라이선스를 발급해준다. 그러니까 프로테스트는 프로 데뷔라는 내 꿈을 향한 첫 번째 관문인 셈이었다. 테스트는 간단하다. 체급에 맞는 상대와 스파링 하는 것을 다수의 협회관계자가 보고 테스트 당락 여부를 가린다. 스파링을 통해 프로 시합을 해도 좋은 기본기, 자세, 태도가 되어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우선 체급을 맞춰야 했다. 당시 체중이 88kg정도였다. 테스트를 보기 위해 최소한 78kg까지는 맞춰야 했다. 보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10kg을 감량해야 했다. 다행히도 기본기나 자세, 태도는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때 운동을 한 것도 있고, 복싱을 시작한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름 열심히 훈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장에게 “테스트 보려면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요?”라고 물었다. 관장은 “체중만 맞추면 별 문제 없이 무난할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관장의 시큰둥한 반응에 자신감이 더욱 생겼다.


프로테스트 하던 날

마지막 체중 조절 때문에 이틀 동안 물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 프로테스트 전날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긴장해서가 아니라 목이 말라서. 얼음을 입에 물고서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드디어 테스트 날이 되었다. 빨리 계체(체중을 재는 것)하고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테스트 장소로 가는 길은 왜 그리지 멀기만 한 건지. 겨우 도착해서 계체를 했다. 계체를 마치자마자 마신 물은 이제껏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물 한통을 벌컥거리고 난 후에야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는 예비 프로 복서들의 긴장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테스트는 순서는 대체로 체급 순서로 진행된다. 가벼운 체급이 먼저하고 무거운 체급이 나중에 하게 된다. 나는 78kg급이어서 순서상 가장 마지막이었다. 느긋하게 가벼운 체급 선수들의 테스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체급별로 무난하게 스파링이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72kg급 테스트에서 일이 났다. 크게 휘두르는 펀치가 그대로 상대방의 안면에 꽂혔다. 맞은 쪽 선수는 링 줄에 걸려서 앉은 채로 실신을 해버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어....어....”라고 더듬거리며 흠칫 놀랐다.

   

 다행히 그 선수는 곧 정신 차리고 깨어났지만 정작 내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었다. ‘헤드기어에 14온스 글러브를 끼고도 실신이 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게 프로 복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 선수를 지망하는 친구들의 기세는 거칠었고, 공격은 매서웠다. 젠장, 그때부터 긴장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건 체육관에서 일반 회원들과 하는 스파링과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잘못하면 나도 실신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점점 나를 죄여 들어오고 있었다.



돌발변수, 100kg 선수와 대결

큰일 났다. 안 그래도 긴장이 밀려왔는데 더 큰 변수가 생겼다. 원래 91kg 이상 체급 두 선수가 스파링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선수가 테스트에 불참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100kg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선수를 내가 상대하게 된 것이었다. 가장 비슷한 체급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듣고 나서부터 긴장과 두려움은 급격히 더해졌다. 갑자기 몰아닥친 긴장과 두려움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야속하게 스파링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막상 마주선 상대는 더욱 커보였다. 솔직히 스파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코너에서 상대 펀치를 한 방 맞고 잠시 다리가 풀렸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긴장하지 않은 척, 두려워하지 않은 척 하기위해 쉬지 않고 풋워크를 했다는 것 정도가 기억난다. 그렇게 3분 2라운드의 프로테스트 스파링이 끝이 났다. 상대와 체급 차가 너무 차이가 났던 것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기본적인 자세나 움직임이 괜찮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테스트에 합격했다.



 링을 내려오면서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뭐랄까? 도저히 닿지 못할 것 같은 꿈에 몇 걸음 훌쩍 다가선 느낌이랄까? 긴장되고 두려워서 도망만 다녔던 일에 당당하게 맞서다는 자기긍정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합격까지 했으니 어찌 기분이 않을 수 있었을까. 이 좋은 기분을 가장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관장이었다. 의지가 되었고,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관장의 표정은 좋지가 않았다. 밝게 웃는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뭔가 불만스럽고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이유를 짐작은 했다. 확인 차 물었다. “관장님, 프로테스트 어땠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관장은 답했다. “형님,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시합 시작도 하기 전에 겁먹고 뒤로 빼면 안돼요. 그런 프로 복서가 어딨어요. 크게 한방 걸린 것도 그러다 걸린 거잖아요. 체급차이 많이 안 났으면 떨어졌을 거예요” 민망해졌다. 열심히 공부해서 받아온 성적을 엄마에게 자랑했는데, “이걸 성적이라고 받아 온 거니?”라고 되려 혼났을 때 느꼈던 민망함 같은 거였다. 언제나 그렇듯 민망함 뒤에 찾아오는 감정은 서운함이다. 서운했다. 내게는 프로 테스트 자체가 큰 도전이었지만, 관장은 그것 이해 못해주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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