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향성? 내향성?
‘외향성’과 ‘내향성’은 무엇일까? 이는 한 사람의 성향을 거칠게 구분하는 기준이다. 외향성과 내향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세상’이라는)외부세계에 더 관심을 갖는 성향을 외향성으로, (‘나’라는)내부세계에 관심을 더 갖는 성향을 내향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 사건 자체에 관심을 갖는지(교통사고가 났네!) 아니면 사건의 의미에 관심을 갖는지(저 교통사고는 왜 나게 되었을까?)에 따라 외향성과 내향성을 구분하기도 한다.
다양한 구분 방법 중, 우리는 외향성과 내향성을 ‘휴식’과 ‘외부자극’이라는 관점에서 구분해보자. 먼저 ‘휴식’의 관점으로 구분해보자. 외향적인 이들과 내향적인 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방식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외향적인 이들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에너지를 모으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 내향적인 이들은 홀로 혹은 소수의 사람들과 있는 과정에서 휴식을 취하며 에너지를 모으려는 경향이 있다.
‘외부자극’의 관점에서도 두 성향은 차이를 보인다. 정확히는 외부자극의 수용성에서 차이가 난다. 외향적인 이들은 크고 강렬한 자극에 익숙하고 끌리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외향적인 이들은 낯선 사람들과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것에 익숙하고 끌린다. 반면 내향적이 이들은 작고 적은 자극에 익숙하고 끌리는 경향이 있다. 혼자 산책을 한다든지,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는다던지, 아주 친한 소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익숙하고 끌리는 이들이 내향적인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내향성’은 어떻게 ‘소심함’이 되었을까?
외향성과 내향성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성향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가치중립적이다. 하지만 우리네 사회는 내향성을 부정적 가치로 여겨왔다. 왜 그랬던 걸까? 달리 말해, 왜 우리 사회는 ‘내향성’(가치중립적)과 ‘소심함’(부정적)을 교묘하게 등치시키면서 ‘내향성’을 폄하하고 비난했던 걸까?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에 가깝다.
국가마다 시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사회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해왔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촌락을 이루어 농사를 지으며 삶을 이어가던 농경사회에서, 도심의 공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산업사회로 변해왔다. 한국 1960~80년대는 농촌(농사)에서 도심(공장)으로 인구가 대거 이동하는 시기였다. 이런 산업화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정서적인 관점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까?
낯섦의 일상화다. 쉽게 말해, 낯선 사람(혹은 환경)과의 만남이 일상화되었다. 지금 우리야 낯선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던 시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때 그것은 생경하고 낯선 경험이었을 테다. 당연하지 않은가? 농경사회에서는 잘 아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 함께 모여 살아가는 마을 공동체적 환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정서적 관점에서 볼 때, 농경사회는 익숙함(작고 적은 자극)이 일상화된 사회이고, 산업사회는 낯섦(크고 강렬한 자극)이 일상화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우리가 대해야 할 사람을 ‘소수의 익숙한 이웃’에서 ‘다수의 낯선 직원’으로 바꾼 셈이다. 바로 여기가 문제의 시작이다. 산업화 환경에서 외향적인 이들과 내향적인 이들 중 누가 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외향적인 사람이다. 내향적인 이들은 다수의 낯선 사람들을 대하는데 상당한 에너지가 들지만 외향적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외향적인 이들은 다수의 낯선 사람(혹은 환경)들을 대하는 데 비교적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외향적인 이들은 낯선 이들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들은 크고 강렬한 자극(다양한 사람들‧낯선 환경)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니까 말이다.
‘내향성=소심함’ 죄책감 없는 폭력의 근거
산업화 이후, 사회의 권력은 외향적인 이들에게 집중된 경향이 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산업화 시대에서는 내향적인 이들보다 외향적인 이들이 비교적 더 많은 성취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크고 강렬한 자극에 익숙하고 끌리는 (외향적인) 이들은 내향적인 이들보다 산업사회에 더 잘 적응했을 테니까. 외향성은 산업사회의 특성에 부합하는 성향이었다. 반대로 생각해보라. 농경사회에서 외향적인 이들은 진득하게 농사는 안 짓고 옆 동네로 싸돌아다닌다고 핀잔을 듣지 않았을까?
이것이 ‘내향성’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성향을 ‘소심함’이라는 부정적 가치로 비난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을 쥔 이들이 자신의 성공을 성급하게 일반화할 때, 사회적 권력은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폭력이 된다. 자신의 성공방정식을 타인들에게 폭력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은 일상 도처에 존재한다. 내향적인 아들이 못마땅해 강제로 웅변학원이나 태권도 체육관으로 보내는 외향적인 아버지는 아직 흔하다. 내향적인 직원이 못마땅해 영업직을 강요하며 낯선 사람들 앞으로 내모는 외향적인 사장도 여전히 있다.
권력 쥔 외향적인 이들은 자신의 폭력에 죄책감이 없다. 그것은 “다 너 잘돼라”고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내향적인 이들에게 소심함이라는 누명을 씌우려는 이유를 알겠다. 그것은 내향적인 이들에게 외향적인 이가 되라고 강요하는 폭력을 ‘죄책감 없이’ 행사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향성을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놓아두면 외향성의 강요는 폭력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면 권력을 쥔 이들은 불편함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쨌든 폭력은 나쁜 것이니까.
우리 사회는 이것이 싫은 것이다. 그들은 ‘불편함‧죄책감 없이’ 폭력을 자행할 방법을 찾았다. ‘내향성’(가치중립적)을 ‘소심함’(부정적)으로 치부하면 된다. ‘내향성=소심함’이라는 도식이 성립될 때, 내향적인 이들에게 외향성을 강요하는 폭력은 선한 조언으로 둔갑된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것이 우리 사회가 내향성을 소심함으로 치부하려는 이유다. 이것이 내향적인 이들이 상처받아 저마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어둠이 생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