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심타파

소심함, 내향성과 외향성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하는 질병

우리에게는 ‘내향성’과 ‘외향성’이 공존한다.


소심함이 무엇인가? 과도하게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마음 아닌가? 이는 내향성‧외향성이라는 한 사람의 성향과 아무 상관이 없다. 소심함은 나쁜 것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내향성‧외향성은 가치중립적이다. 옳고 그름이 없다. 내향적인 이들은 내향적으로 살면 되고, 외향적인 이들은 외향적으로 살면 된다. 어느 성향이 더 좋거나 나쁘다고 가치 평가할 필요도 없다. 또 어느 성향이 되라고 강권할 필요도 없다. 그런 가치평가와 강권은 폭력인 동시에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내향적인 면과 외향적인 면이 모두 존재한다. 완전히 외향적인 사람도 없고, 완전히 내향적인 사람도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1년 365일을 낯선 사람과 낯선 환경에서 왁자지껄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외향적인 사람은 없다. 아무리 외향적인 이들이라도 잠시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반대로 1년 365일을 산 속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살 수 있을 만큼 내향적인 사람도 없다. 아무리 내향적인 이들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소심함, 내향성과 외향성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하는 질병


내향적인 이는 외향성과 내향성 중 내향적인 면이 조금 더 도드라지는 사람이며, 외향적인 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너는 너무 내향적이야.”라는 일반화는 얼마나 폭력적이며 무의미한가. 또 “너는 더 외향적이 되어야 해”라는 강권 또한 얼마나 폭력적이며 무의미한가. 두 가지 성향 모두 이미 우리 속에 있으니까 말이다.


내향성, 외향성이든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내향성과 외향성은 균형의 문제일 뿐이다. ‘히키코모리’처럼 늘 혼자 방안에만 있어야만 안정을 느낄 정도로 내향적이지만 않으면 된다. 또 ‘관계중독자’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떠들 때만 겨우 불안을 멈출 수 있을 정도로 외향적이지만 않으면 된다.


‘내향성‧외향성’은 ‘소심함’과 다른 층위의 문제이지만, 이는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 우리는 종종 내향성과 외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할 때가 있다. 달리 말해, 과도하게 내향적(히키코모리)이 될 때도 있고. 과도하게 외향적(관계중독자)이 될 때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소심함 때문이다. '히키코모리'도, '관계중독자'도 모두 소심하다.


소심함이란, 우리 속에 있는 내향성과 외향성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지 못하게 하는 마음의 질병인지도 모르겠다. ‘히키코모리’도, ‘관계중독자’도,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소심한 이들이니까 말이다. ‘히키코모리’는 모든 타인(불특정다수)을 제거함으로써 의미 있는 단 한 사람의 시선마저 제거하려는 사람이다. ‘관계중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든 타인(불특정다수) 속에 파묻힘으로써 의미 있는 한 사람의 시선마저 제거하려는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타인의 시선을 지독히도 두려워하는 소심한 이들이다. '히키코모리' 또는 '관계중독자'는 방에 갇혔느냐 사람들 속에 갇혀 버렸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타인의 시선을 피해 저마다의 도피처에 갇힌 것은 마찬가지다. ‘히키코모리’ 혹은 ‘관계중독자’는 균형을 잃고 넘어진 이들이다. 이들은 소심함 때문에 내향성과 외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져 버린 상태인 셈이다. 소심함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극단적인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휩쓸려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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