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함과 소심함은 왜 헷갈릴까?
내향적인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신중함이다. 내향적인 이들은 신중하다. 어떤 사안에 대해 경솔하게 선택하고 판단하기보다 시간을 갖고 차분하게 들여다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신중함은 종종 소심함으로 오해되곤 한다. 신중한 사람에게 소심한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하고, 또 한 없이 소심한 사람을 신중한 사람이라고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곤 한다. 이런 왜곡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신중함과 소심함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난 짜장면, 넌 뭐 먹을 거야?”
“나? 어...나도 짜장면, 아니다. 그냥 짬뽕 먹을게. 아니, 잠깐만 기다려 봐...생각 좀 해보고”
“뭘 그리 고민해.”
“남자친구 생일인데, 선물로 가방이 좋을지 향수가 좋을지 생각해보고 있어.”
‘세진’은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짜장면을 시키려고 하니 얼큰한 짬뽕이 눈에 밝히고, 짬뽕을 시키려고 하니 달작 지근한 짜장면이 아른 거린다. ‘미연’이는 가방과 향수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향수를 선물하자니 남자친구의 낡은 가방이 눈에 밟히고, 가방을 선물하자니 향수를 사고 싶다는 남자친구의 표정이 아른 거린다. 이 둘은 신중한 것일까? 소심한 것일까? 쉽게 답할 수 없다. 질문을 바꿔보자.
우리는 왜 신중함과 소심함을 명쾌하게 구분하지 못할까? 신중함과 소심함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겉모습은 무엇일까? 결정유보다. 즉, 신중함이든, 소심함이든 어떤 사안에 대해 당장 처리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루어두려는 측면이 있다. 그 겉모습만으로는 신중함과 소심함을 구분하기 어렵다. 둘 모두 결정을 유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세진’과 ‘미연’ 역시 마찬가지다. 둘 모두 결정을 유보하고 있기 때문에 그네들이 신중한지 소심한지 판단내리기 어렵다.
신중함과 소심함은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어떻게 둘을 구분할 수 있을까? 결정유보의 내적 메커니즘에 들여다보아야 한다. 쉽게 말해, 결정을 유보하게 되는 마음 상태를 분석해봐야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왜 결정을 미루는가?’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을 미루는가?’ 이 두 질문을 통해 신중함과 소심함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해보자.
1. 왜 결정을 미루는가?
‘왜 결정을 미루는가?’ 신중함과 소심함을 가름할 수 있는 질문이다. 후회의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미루면 소심함이고, 최선의 결정을 위해서 결정을 미루면 신중함이다. ‘세진’은 왜 결정을 미루고 있을까? 짜장면(짬뽕)을 선택하면 짬뽕(짜장면)을 먹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봐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심한 이들은 포기할 것에만 시선이 머무른다. 포기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봐, 그 후회의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미루게 된다. 이것은 소심함이다.
모든 결정유보가 이런 메커니즘을 따라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미연’은 왜 결정을 미루고 있을까? 향수(가방)를 샀을 때 가방(향수)을 사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봐? 아니다. ‘미연’이 결정을 유보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결정하기 위해서다. 최선을 결정을 하기 위해서 결정을 유보하고 있다. 미연은 어떤 선물을 해야 남자친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잠시 결정을 미루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신중함이다.
소심한 이들은 종속적으로 살아가고 신중한 이들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래서다. 소심한 이들은 후회가 두려워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끝내 외부상황이 그 결정을 대신하게 된다,(너 그냥 짜장면 먹어!) 하지만 신중한 이들은 결정의 순간이 되면 스스로 결정한다.(이번 생일 선물은 가방으로 할래) 그래서 신중한 이들은 어느 시기에 결정을 미루더라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신중한 이들은 좀처럼 남 탓을 하지 않지만, 소심한 이들이 습관적으로 외부상황‧조건을 탓하곤 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소심한 이들은 후회가 두려워 결국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그러니 외부상황‧조건이 그 결정을 대신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소심한 이들은 어찌 늘 남 탓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짜장면 먹으라고 재촉한 동료만 없었으면” “점심시간이 두 시간이었다면” “직장만 다니지 않았다면” 소심한 이들은 종속적으로 살 수밖에 없기에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하게 된다. 소심함은 얼마나 유해한가.
2. 어떤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미루는가?
‘어떤 사안에 대해서 결정을 미루는가?’ 이 질문 역시 신중함과 소심함의 경계를 구분 짓는 중요한 질문이다. 사소한 사안에 결정을 미루면 소심함이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 결정을 미루면 신중함이다. 소심한 이들은 사소한 사안에 대해 결정을 미룬다. 짜장면인지 짬뽕인지, 아메리카노인지 라떼인지, 버스를 탈지 지하철을 탈지를 선택하지 못하고 결정을 미룬다. 소심한 이들은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는 일에 대해 과도하게 고민하느라 결정을 유보한다. 이는 소심함의 전형적인 특징인 우유부단함이고 결정장애다.
다시 ‘세진’과 ‘미연’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제 우리는 ‘세진’과 ‘미연’이 신중한지 소심한지 가름 할 수 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이 사안이 ‘세진’의 삶에 중차대한 문제라면 ‘세진’은 신중하다. 반면 그것이 ‘세진’에게 지극히 사소한 문제라면 ‘세진’은 소심하다. ‘미연’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친구 생일선물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이 사안이 ‘미연’의 삶에 사소한 문제라면 ‘미연’은 소심하다. 반면 그것이 ‘미연’의 삶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면 ‘미연’은 신중하다.
‘미연’은 신중하다. 그녀에게 남자친구의 생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아메리카노냐? 라떼냐?’를 고민할 여력이 없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연인의 선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은 사소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고민할 수가 없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선택하기 위해 온 힘을 쓰고 있는 까닭이다. 신중한 이들 역시 고민하느라 결정을 유보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다.
‘세진’은 소심하다. 그녀에게 점심메뉴는 사소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사소한 문제에 대해 과도하게 고민하느라 결정을 유보하고 있다. 이런 사소한 일에 대한 결정유보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세진’은 왜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과도하게 고민하고 있는 걸까? 단순한 우유부단함일까?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적 도피일 수 있다. 달리 말해, ‘세진’의 우유부단함은 자신 삶의 중요한 문제로부터 도망치려는 무의식적인 반응일 수 있다. 이는 과도한 해석이 아니다.
‘세진’은 직장에서 완전히 지쳐버렸다. 일에서도, 사람에서도 지쳐버렸다. ‘세진’은 알고 있다. 직장의 문제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걸. 직장을 그만두든, 직장을 옮기든, 지금 직장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직장을 옮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다.
‘세진’은 그 중요한 문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소한 문제 앞에서 과도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어떤 사안이든 결정을 위한 고민에는 에너지가 든다. ‘세진’은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사소한 문제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 마치 숙제를 하지 않았다는 불안감을 잊기 위해 게임 속 선택에 집착하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이 도피는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뤄지기에 ‘세진’조차 ‘의식’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심각한 문제다.
소심한 이들은 종종 사소한 문제를 결정내리지 못하고 과도하게 고민한다. 이는 자신의 중요한 문제를 은폐하고 도피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반응일 수 있다. 소심한 이들이 종종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덮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숙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게임에 집착하는 아이는 불안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소심함은 얼마나 유해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