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감함이 소심함이다.
우리는 때로 무심함과 둔감함을 당당함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둔감함은 무엇인가? 나의 감정변화도, 타인의 감정변화도 포착하지 못하는 마음, 타인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조차 없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무심하고 둔감한 사람들이다. ‘명석’과 ‘경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명석’은 섬세한지 소심한지는 고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안’이 무심하고 둔감한 것은 분명하다.
‘경안’은 친한 친구가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았고 그의 마음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친구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소심함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무심하고 둔감했기 때문이다. 이런 무심함과 둔감함은 당당함이나 담대함이 아니라 소심함이다. 이는 무심함‧둔감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납득할 수 있다. ‘경안’의 무심함과 둔감함은 어디서 왔을까?
소심함이다. 작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큰 기쁨을 포기하는 소심함. 나와 타인의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것.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 이는 분명 때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 사회는 이성적으로 살아가기(학교에서 공부. 직장에서 일)를 강요한다. 그 강요 속에서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얼마나 귀찮고 불편한 일인가. 경수는 공부하기 위해서, 일하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섬세함을 던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섬세함은 때로 고통을 주지만 이는 우리가 얻을 기쁨에 비하면 턱 없이 작은 고통이다.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타인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을 때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기에 영화‧음악‧그림‧사진‧소설이 주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또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사랑이라는 거대한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둔감한 이들은 작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큰 기쁨을 포기해버린 이들이다. 이들은 얼마나 소심한가. 마치 주사 맞는 것(작은 고통)이 두려워 건강한 삶(큰 기쁨)을 포기해버리는 아이처럼 말이다.
섬세함은 당당함이다.
섬세함은 당당함이다. 섬세함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전에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는 마음 아닌가. 이는 소심한 이들은 좀처럼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소심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기보다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말이다. 당당한 이들만이 옆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리는 비를 보며, 길가에 핀 꽃을 보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다.
섬세함은 담대함이다. 섬세함은 타인이 상처받을까봐 타인의 마음을 읽으려는 마음 아닌가. 이는 소심한 이들 좀처럼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소심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이 상처받을까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심한 이들이 타인의 마음을 읽으려는 것은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다. 오직 담대한 이들만이 ‘내’가 아니라 ‘너’가 상처받을까 걱정이 되어 너의 마음을 읽어내려 애쓸 수 있다. ‘나’보다 ‘너’를 더 소중히 대하는 담대함이 없다면, 섬세함은 소심함으로 너무 쉽게 전락된다.
소심하면 우울해지고 섬세하면 유쾌해진다.
소심한 사람은 끝내 우울해지고 침잠된다. 소심함에는 세 가지 마음이 있다. 둔감한 소심함, ‘나’의 감정보다 ‘너’의 감정에 집중하는 소심함. ‘내’가 상처받을까봐 ‘너’의 마음을 읽으려는 소심함. 이는 모두 끝내는 우울하고 침잠된 삶으로 귀결된다. 무심하고 둔감하게 살면 사람에게 상처받을 일이 적다. 나의 감정에도 타인의 감점에도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기계의 삶에 가깝지 인간의 삶은 아니다. 기계 같은 삶은 편안할 수 있어도 끝내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니까.
‘나’의 감정보다 ‘너’의 감정에만 집중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나’는 없고 ‘너’만이 가득 찬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이는 “넌 참 착하구나”라는 공허한 칭찬을 대가로 한 없이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은 무의미한 ‘나’로 인해 우울하고 침잠된다. ‘나’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쓰는 삶도 마찬가지다. 이는 타인들에게 아무리 친절을 베풀고 배려를 해도 외롭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은 ‘너’는 없고 ‘나’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런 세상의 삶은 무의미한 ‘너’들로 인해 우울하고 침잠된다.
섬세한 사람은 끝내 유쾌해진다. 물론 섬세한 이들은 종종 상처받는다. 기계 아닌 인간처럼 살려고 했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감정변화에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감정의 롤러코스터 때문에 시, 음악, 영화, 소설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또 섬세한 이들은 ‘너’보다 ‘나’의 감정에 집중하기 때문에 때로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나’를 지켜낼 수 있다.
‘나’보다 ‘너’가 상처받을 것을 더 걱정하는 섬세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종종 ‘나’를 함부로 대하는 ‘너’를 만나게 된다. ‘너’를 진심으로 아끼는 이들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용하는 ‘나’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던가. 그러니 섬세한 이들은 늘 크고 작은 상처투성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오직 ‘나’밖에 없는 무인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보다 ‘너’를 더 아끼는 이는 머지않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너’를 곧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섬세한 이들은 작은 고통과 상처를 넘어 큰 기쁨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