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심타파

운명론적 태도, 우주론적 태도.

미신 형성의 내적 원리


혈액형 별 성격구분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다. 미신(비합리적 믿음)이다. 혈액형 별 성격구분의 형성과정은 미신이 형성되는 내적 원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부분의 미신은 자의식 과잉 상태에서 발생하는 ‘보편성의 개별적 인식’ 통해 만들어진다. 점을 보러 갔다고 해보자. “어렸을 크게 아픈 적 있었지?” 점쟁이가 물었다. 이때 자의식 과잉 상태인 이들은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화들짝 놀라며 신통한 점쟁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는 전형적인 ‘보편성의 개별적 인식’이다.


어렸을 때 크게 한 번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어렸을 때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고, 그 아팠던 일 중에 제일 아팠던 일이 ‘크게 아픈 적’으로 기억되니까 말이다. 그것은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일이다. 하지만 자의식 과잉인 이들은 그런 보편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누구나(타인) 어렸을 크고 작은 질병이나 사고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자의식 과잉이 심할수록 미신(점쟁이)에 더 쉽게 휩쓸리게 된다.


그렇게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믿음은 외부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점이 된다. 일단 믿게 된 점쟁이의 말은 단순한 참조점이 아니다. 점쟁이의 말은 외부세계를 선별적으로 판단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기준점이 된다. “아버지가 화가 많으시지?” 점쟁이의 말에 평소 온화했던 아버지보다 화를 내었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동생이 사고를 많이 쳤지?” 점쟁이의 말에 평소 모범생이었던 동생이 어제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것을 ‘사고’로 해석하게 된다.


점쟁이에게 현혹되는 양상과 혈액형별 성격구분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양상은 정확히 동일하다. 혈액형별 성격구분도 일종의 미신이다. 이런 미신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미신은 필연적으로 운명론적 태도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운명을 타고 태어났으니, 다른 삶을 살아볼 도리가 없어.” 이런 운명론적 태도는 한 사람의 삶을 운명에 예속시켜 슬픔과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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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운명론적 태도

점쟁이를 맹신하는 이를 생각해보자. “너는 불의 기운을 타고 났어. 물과 상극이니 항상 물을 조심해야 돼.” 이런 점쟁이의 진단에 그는 어떻게 살게 될까? 점쟁이의 말에 예속되어 살게 된다. 불의 기운을 타고났으니 불의 기운처럼 살려고 애를 쓸 테고, 크고 작은 물을 피해 다니게 될 테다. 점쟁이의 말에 예속되어 그의 삶은 지극히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운명론적 태도다.


이런 운명론적 태도는 더 적고 작은 기쁨과 행복을, 더 많고 큰 슬픔과 불행을 불러 올 수밖에 없다. 운명이든 감옥이든, 어디든 갇혀 있는 삶에 기쁨과 행복보다 슬픔과 불행이 더 크고 많을 것이란 사실은 자명하지 않은가. 혈액형 별 성격구분이라는 미신도 마찬가지다. 이 미신을 따르면 어떻게 될까? “그래, 내가 소심한 건 어쩔 수 없어. 난 A형이니까” 즉, A형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소심함을 손쉽게 정당화할 것이고, 점점 A형다워지느라 점점 더 소심해질지도 모른다.


운명은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그저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혈액을 다 빼버리면 죽어버리는 것처럼, 혈액형은 죽기 전에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니까 말이다. 이런 운명론적 태도는 소심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명론적 태도는 삶이라는 여행을 즐기지 못하고, 안전한 집에만 머무르려는 마음이다. 삶이라는 여행에서 만나게 될 잠재적인 두려움 때문에 여행 자체를 포기하는 소심함. 그것이 운명론적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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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우주론적 태도


한 사람은 우주다.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한 사람 안에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성격과 기질, 성향이 있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한다. 우주는 그 속에 있는 무한한 존재들이 서로 마주치면서 무언가가 생성되고 소멸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는 우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속에는 수 없이 다양한 성격, 기질, 성향이 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떠한 마주침을 만나느냐에 따라 어떤 것은 생성되고 어떤 것은 소멸된다. 그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성격, 기질, 성향은 끊임없이 변화되어 간다. 우리는 우주니까.


이것이 우주론적 태도다. 이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는 삶에서 직접 경험하며 살아간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어떤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어떤 연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어떤 직업을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운명론적 태도가 소심함이라면, 우주론적 태도는 담대함이다. 크고 작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집을 나서 흥미진진한 여행을 떠나려는 담대함.


소심함은 슬픔과 불행을, 담대함은 기쁨과 행복을 준다. ‘나’와 ‘타인’을 모든 것이 결정된 ‘운명론적 태도’로 대하면 삶은 슬픔과 불행으로 빠지게 되는 까닭이다.. 반면 ‘나’와 ‘타인’을 무수히 많은 것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우주론적 태도’로 대하면 삶은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까닭이다. 이것이 우리가 혈액형뿐만 아니라 모든 미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소심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담대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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