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함은 트라우마다.
우리는 왜 소심해지는 걸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원장면primal scene’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트라우마(공포‧불안‧수치심 혹은 특정한 신체적 고통)를 일으키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의미한다. 이는 어렵지 않다. 어린 시절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특정한 조건(새벽, 횡단보도, 검은색 승용차)에 놓이면 극심한 공포, 불안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그때 다쳤던 왼쪽 다리가 다시 욱신거리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서까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어린 시절 기억. 이것이 바로 ‘원장면’이다.
소심함은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소심하고 싶어서 소심한 사람은 없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트라우마처럼, 소심함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들 크고 작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살고 싶겠는가? 누군들 주변 사람들 눈치 보느라 할 말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살고 싶겠는가? 어떤 결정을 내렸다가 뭔가 일이 잘못될까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할 말을 다했다가는 뭔가 큰 일이 날까봐 불안해서 그러는 것이다. 이것은 ‘트라우마’가 작동하는 내적원리와 같다.
소심함이 트라우마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장면’이 있다. 소심함의 ‘원장면’. 그것이 바로 소심함의 원인인 셈이다. 직장인이었던 시절, 나는 소심했다. 나의 소심함은 압도적인 힘(권력)이 있는 사람 앞에만 서면 공포, 불안을 느껴 주눅이 드는 것이었다. 과장‧차장 앞에서는 할 말을 했지만, 상무‧사장 앞에서는 공포와 불안 때문에 늘 주눅이 들었다. 작은 권력 앞에서는 당당하고, 큰 권력 앞에서는 위축되는 이 비루한 마음, 얼마나 소심한가.
소심함의 ‘원장면’primal scene
내 소심함의 ‘원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중학교 때였다. 자습 시간이 끝난 뒤 담임이 들어와서 소리를 지르면서 다그쳤다. “아까 자습 시간에 교실 밖으로 장난치면서 나온 새끼들 누고?” 나와 친구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진규, 앞으로 나와” 담임은 교탁으로 나가는 걸음이 채 멈추기도 전에 내 뺨을 후려 쳤다. 다음으로 친구를 불렀다. “한 번만 더 떠들모 그때는 진짜 가만 안 둔다. 알겠나?” 친구는 짧은 꾸중을 듣고 자리로 돌아갔다.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화가 나서 따져 물었다. “왜 저만 때리시는 데예?”
한 참을 맞았는데,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맞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선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다음 날, 욱신거리는 뺨을 부여잡으며 없는 살림에 담임에게 촌지를 건네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것이 내 소심함의 ‘원장면’이다. 압도적인 권력이 있는 사람 앞에서 설 때면, 나는 다시 중학생이 되어 그 선생 앞에서 다시 서게 되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제 서야 알았다. 상무‧사장 앞에서 서면 공포와 불안뿐만 아니라 왜 뺨이 이유 없이 따끔거렸는지도 말이다.
주변의 눈치만 보고 할 말을 못하는 소심한 이를 알고 있다. 그녀는 왜 소심해졌을까? 어린 시절, 그녀는 엄마에게 인형을 사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다. “자꾸 떼쓰면 엄마 집 나가 버릴 거야.” 어머니는 정말로 잠시 집을 비웠고, 혼자 남겨진 아이는 무서움에 떨다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 이것이 그녀의 ‘원장면’이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무엇인가를 다시 요구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다시 혼자 집에 남겨진 두려움에 오줌을 싸는 아이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니 어찌 그녀가 소심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원장면’은 소급적으로 반복된다.
어린 시절 몇 번의 기억으로 우리는 소심해진다. 정확히는 ‘원장면’의 기억으로 소심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원장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원장면’은 ‘사후 소급적으로 구성된 환상’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소급’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즉, ‘원장면’은 그 ‘원장면’ 이후에 발생하는 일들을 통해 과거로 거슬러 가서 구성된다는 의미다.
담임에게 뺨을 맞았던 ‘원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그 어린 시절의 ‘원장면’ 자체는 트라우마를 일으킬 만큼 효력이 강하지 않다. 그 ‘원장면’이 (트라우마를 일으킬) 효력을 얻는 것은, 그 ‘원장면’이 이후로 펼쳐졌던 직간접적인 일들을 통해서다. 교수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다 F를 받은 일, 군대의 부조리에 대해 말하다 구타를 당한 일 등등. 이런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다시 ‘원장면’이 소급적용 된다. 이 반복된 소급적용을 통해 어린 시절 ‘원장면’은 ‘트라우마’(소심함)를 발현시킬 효력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