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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라는 하이퍼리얼리티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진짜 같은 가짜'가 아니라, '가짜같은 진짜'다.
                

“아, 진짜 저랬는데” ‘D.P’라는 드라마를 보며 내뱉은 말이다. 섬뜩한 일이다. 그 드라마 속에 등장한 군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가혹행위들이 섬뜩해서가 아니었다. 그 드라마를 보며 과한 공감을 했다는 것이 섬뜩했다.       


 ‘D.P’를 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재미’와 ‘운동movement’ 여느 드라마처럼 ‘D.P’를 재미로 본다면 아무 문제없다. 그냥 재밌게 보면 된다. 재미로 본다는 것은 소비한다는 의미고, 소비한 자리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운동’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즉, 군대 내의 각종 부조리하고 비인권적인 행태들을 환기⸳고발함으로써 사회적 변화를 바라는 관점으로 이 드라마를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이라면 조심스러워야 한다.


 “디피는 ‘이제는 좋아졌다’는 망각의 유령과 싸우기 위해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분들에게 힘을 보탤 수 있길. 오늘도 어디선가 홀로 울고 있을 누군가에게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줄 수 있길 바란다.” ‘D.P’의 원작자의 말이다. 원작자는 ‘운동’적인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원작자의 ‘운동’적인 바람은 흥행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을까?


 ‘D.P’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적이다. ‘하이퍼리얼리즘’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극한적hyper으로 진짜real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피부를 극한적으로 확대하여 정밀하게 보여줌으로서 잔혹한(징그러운, 괴기스러운) 인상이나 충격을 주는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D.P'를 보며 느끼는 잔혹한, 징그러운, 괴기스러운 인상이나 충격은 ’D.P‘가 가진 ‘하이퍼리얼리즘’적 속성 때문이다. ‘D.P’는 그만큼이나 진짜real 군생활을 극한적hyper으로 보여주었다.


Arinze Stanley Egbengwu 작품

      

 그렇다면 묻자. 극한적으로 표현된 진짜hyperrealism는 진짜realism인가? 나는 20년 전에 군대를 다녀왔다. 군내 가혹행위의 정도는 대체로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정해진다. 선배 세대들보다 지금 세대가 가혹행위가 덜하고, 지금 세대보다 다음 세대의 가혹행위가 덜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동시대라 하더라도, 공간에 따라 가혹행위의 정도는 또 달라진다. 민간과 교류가 많은 부대일수록 가혹행위가 덜하고, 민간과 교류가 적은(격오지) 부대일수록 가혹행위가 더한 경향이 있다.


 나는 20년 전에 격오지인 섬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곳에는 그 시대에 그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정도의 가혹행위들이 존재했다. ‘D.P’에 등장한 각종 가혹행위 중에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있다. 하지만 20년 전, 섬에서도 할 수 없었던(해서는 안 되는) 가혹행위도 분명 있다. 그런데도 드라마 속 모든 가혹행위를 보며 “아, 진짜 그랬는데”라며 과한 공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내가 받은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D.P’를 보며 많은 (군대를 다녀온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불운했던 예외적인 이들을 제외하면, 그들의 공감은 분명 나와 같은 과한 공감이었을 테고, 그것은 아마 자신들이 받은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이런 과공감과 과장된 고통은 군대 문제를 해소하는 운동의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원작자의 바람과 달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이퍼리얼리즘’은 가짜다. 그것은 진짜를 상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상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피부를 극한으로 확대해 보여주는 것은 진짜 피부가 아니다. 그것은 진짜를 가장한 가짜에 가깝다. 이것이 ‘하이퍼리얼리즘’의 역설이다. ‘하이퍼리얼리즘’은 리얼리즘(진짜)의 극단화된 형태이지만, 이는 사실적 표현을 통해 리얼리즘(진짜)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극단적으로 리얼하게 묘사된 사과 그림은 결국 묘사(진짜 사과가 아니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지 않은가.


    

 이것이 ‘하이퍼리얼리즘’이 사회를 바꾸는 운동의 동력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D.P’는 군대 문제를 변혁시킬 힘이 없다. 비단 ‘D.P’ 뿐만 아니라 ‘하이퍼리얼리즘'적인 많은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퍼리얼리즘’적 영화나 드라마는 이슈 몰이가 된다. 왜 그런가? 과공감과 과장된 고통을 통해 자기연민을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삶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너희들이 군 생활을 알아! 나는 지금 내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어!” 이것은 얼마나 달콤한가. 이 달콤한 것이 어찌 이슈몰이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D.P’에 열광하는 적지 않은 이들은 ‘타인’(군대) 문제에 관심이 없다. ‘나’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군대에서 받은 ‘내’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정당화할 지금 ‘내’ 문제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온통 ‘나’에 대한 관심뿐인 이들이 만들어낸 공감대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인간다운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을 저해하는 파벌을 만들 뿐이다. “너는 군대 다녀왔으니(너는 여자니까, 너는 가난하니까) 우리 편! 너는 군대 안 가봤으니까(너는 남자니까, 너는 부자니까) 닥치고 있어!”

      

 중요한 것은 진짜다. 진짜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된다. 거장들이 ‘하이퍼리얼리즘’(진짜 같은 가짜)이 아니라 ‘리얼리즘’(진짜)을 표현하기 위해 애를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하이퍼리얼리즘’은 실재하는 진짜를 극단적으로 과장해서 가짜를 드러내는 일이고, ‘리얼리즘’은 보이지 않기에 가짜라고 여겨지는 진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이창동의 ‘오아시스’,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가 리얼리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세상을 바꾸는 운동은 ‘하이퍼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즘’을 통해서 가능하다. 진짜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까 말이다. 왜 세상을 바꾸는 일이 그리도 어려운지 알겠다. 세상 사람들은 자극적인 ‘하이퍼리얼리티’에 끌리고, 불편한 ‘리얼리티’는 무관심하니까 말이다.  ‘D.P’ 극중 이야기처럼,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라는 마음은 비극적 파국을 맞이할 뿐이다. 뭐라도 바꾸려면 제대로 된 걸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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