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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균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들이여, '나'의 균열이 고막이다.


한동안 반성하며 지냈다.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졌다. “남자(여자)친구 때문에 힘들어요.” “직장생활 짜증나요.” “부모 때문에 힘들어요.” “결혼해서 내 삶이 엉망이 된 것 같아요.”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듣고 싶지 않아졌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없는 이’보다 ‘공감하지 않으려는 이’는 더 나쁘지 않은가. 힘이 없어서 돕지 못하는 이보다 힘이 있지만 돕지 않는 이가 더 나쁜 것처럼 말이다.


 변명하고 싶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철학과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기로 마음먹은 뒤, 나는 늘 타인의 고통과 함께 했다. 누군가의 힘듦을 늘 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힘듦을 가급적 듣고 싶지 않아졌다. 인문주의적 삶을 소망했던 초심을 잃었던 걸까? 나의 반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았다. 나는 왜 누군가의 힘듦을 늘 들어주었던 걸까? 기뻤기 때문이다.      


 무엇이 기뻤을까? 내가 누군가의 힘듦을 들어줄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된 것에 대한 기쁨, 그리고 이론으로만 공부했던 철학의 현실적 지평이 넓어지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전자는 사회적 시선으로 쪼그라든 자아가 채워지는 기쁨이었고, 후자는 철학 실험실에서 임상적 사례들이 채워져 가는 기쁨이었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을 듣는 일은 내게 슬픔이기보다 기쁨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점점 사라져갔다. 나의 철학과 글이 정돈되어가면서 자아는 채워졌고 임상적 사례도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순간, 타인의 고통을 듣는 일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 슬픔은 답답함이었고, 짜증스러움이었다. “왜 그런 일로 징징대고 있는 거야!” 누구나 겪는 삶의 고됨 앞에서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임상적 사례가 필요 없어질 만큼 단단해진 나의 ‘철학’, 타인의 인정 없이도 나로 존재할 수 있는 튼튼한 ‘자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철학’과 ‘자아’로 답답함과 짜증스러움을 누르며 차분하게 타인의 고통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이제 고속도로에 들어선 것이라 믿었다. 내가 그토록 소망하던 인문주의적 삶을 향한 고속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난 지금, 다시 타인의 고통을 듣고 싶지 않아졌다. 왜 그랬을까? 나의 ‘철학’과 ‘자아’가 아직 덜 정돈된 것일까? 한동안 그런 나를 반성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생각했다. 요즘 왜 누군가의 고통이 듣기 싫은가? “씨발년이네, 그 팀장은 입을 찢어버려야 돼!” 누군가 직장생활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말이다. “그런 새끼랑 당장 헤어져!” 누군가 연애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튀어 나온 말이다.


 고속도로 위에서 깨달았다. 내가 한 동안 왜 타인의 고통을 들을 수 있었는지. 또 내가 요즘 왜 타인의 고통을 듣고 싶지 않은지. 내가 타인의 고통을 들을 수 있었던 건, 그 타인을 관조했기 때문이다. 나의 '철학' 속에서 타인을 관조했기에 답답하고 짜증스럽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철학자로 타인의 문제를 차분하게 분석하고 해석해주면 되니까. 이것이 내가 더 이상 타인의 고통을 듣고 싶지 않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고통을 들을 때 나의 ‘철학’과 ‘자아’가 균열 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철학자다. 누군가 직장생활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차분하게 그 문제에 대해 분석해야 한다. 나의 자아는 사랑의 구조에 대해 고민해야한다. 하지만 직장과 연애에 관한 한 사람의 고통을 들을 때, 그 모든 ‘철학’적 분석과 ‘자아’의 고민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가 있다. 팀장 입을 찢고 싶은, 당장 헤어지라고 소리치는 ‘나’만 있다. 차분하며, 분석적이며, 심층적인 철학자는 자꾸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기새끼만 소중히 여기는 철없는 부모만 남았다.        


 타인의 고통을 듣고 싶지 않은 이유는 나의 ‘철학’과 ‘자아’를 지키고 싶은 집착 때문이었다. 구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꿰뚫어 볼 수 있는, 내 앞에 있는 사람과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똑같이 볼 수 있는, 겨우 도달한 ‘철학’적 ‘자아’를 균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구나. 작은 일에 분개하고 소리지르는 소시민적(비철학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내가 싫었던 것이구나. 나는 철학자에 집착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이야기가 그리도 싫었던 것이구나.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이 자꾸만 나를 소시민적 소인배가 되게 하니까 말이다.      


 제기랄.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구나. 내가 타인의 고통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은 이제 겨우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을 들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구나. 단단한 ‘철학’과 튼튼한 ‘자아’보다 ‘한 사람’의 고통이 내게 더 깊게 파고들게 된 것이구나. 나의 소중한 '철학'과 사랑하는 '한 사람' 사이에서 살이 찢기고 있었던 거구나. 그래서 타인의 고통이 듣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나의 '철학'을 지키고 싶어서. 거리 두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잠시 나의 일상과 거리를 둔 고속도로 위에서 나의 고통에 대해서 깨닫는다. 


 인문주의에 고속도로는 없구나. 인문주의는 언제나 한 송이의 꽃이 핀 구불구불하고 거친 들판에 있는 것이구나.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철학’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철학에 도달할 수 있다. 자신의 ‘철학’과 ‘자아’가 균열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철학’과 ‘자아’의 균열의 틈으로만 들리기 때문이다.철학은 철학 너머에 있다. 듣고 싶은 자는 들을 수 없고, 듣고 싶지 않는 자만 들을 수 있다. 반성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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