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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뭐든 처음 시작하면 애가 된다.

한 밤 중 곱창 집에서의 주제 넘는 짓

한 밤 중 곱창 집에서의 주제 넘는 짓

프로테스트 이후 관장에 대한 서운한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름 내게는 어려운 도전이었을 프로테스트 결과에 대해 야박하게 평했던 것이 못내 서운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지도자가 선수에 대해 욕심이 없을까? 자신이 지도한 제자가 남들 보기에 훌륭한 기량을 뽐내기를 바라지 않은 지도자는 없다. 지도자의 기대와 선수의 기량, 그 불일치에서 오는 답답함이나 짜증스러움을 이해 못할 바도 없었다.


 하지만 어디 머리와 감정이 같이 가던가.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감정은 마음에 담겨 있다. 마음에 담겨 있던 서운한 감정이 결국 터져 나오고 말았다. 밤 10시 즈음 운동을 끝내고 체육관을 나왔다. 체육관 앞 곱창 집에서 관장은 지인들과 술을 한잔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관장의 지인들은 나와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형님, 같이 한 잔하고 가세요.”라며 지나치려던 나를 붙잡았다.



 ‘눌러둔 감정은 반드시 터져 나온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옳았다. 소주 한잔씩 속으로 털어 넣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물론 관장과의 술 자리였으니 복싱과 체육관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서운함 때문이었을까? 관장에게 주제 넘는 이야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관장님은 나이에 비해 올드하게 체육관을 운영하는 거 아니에요?” “돈 되는 일반 회원만 관리하고 프로 선수 발굴이나 육성에는 소홀한 거 아니에요?” 관장에게 조언을 하는 체 하면서 관장을 비난하고 힐난 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불쾌한 기분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불쾌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서 온 감정이었다. 어제 밤에 관장에게 했던 이야기들은 분명 주제 넘는 짓이었다. 아니 주제 넘는 짓이기 이전에 그건 유치하고 비열한 행동이었다. 기분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될 것을 나는 평소 관장이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던 부분을 들춰냈던 것이다. 내가 받은 민망함, 서운함을 그렇게 돌려주고 싶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복싱을 시작하면서 나는 애가 되었다.

   

서른일곱,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나름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구를 만나도 떳떳했으며, 스스로 창피하다고 여길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 관장에게 했던 주제 넘는 이야기들이 더욱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보다 더 유치하고, 그보다 더 비열할 수 있을까? 그보다 더 창피할 수 있을까? 마치 그건 어린 아이들이 기분이 나쁠 때, 집요하게 친구의 약점을 놀리는 그런 행동이었다. 내가 바로 그런 유치한 아이가 되어 버린 거였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창피했고 또 관장에게 미안했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처음부터 복기해보아야만 했다. 그런 창피한 일은 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사건의 발단은 프로테스트 장소에서 느꼈던 민망함, 서운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관장의 야박한 평가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가만?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하면서도 그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던가?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관장이 보기엔 마뜩치 않아 보였던 적도 많았다. 그리고 냉정하고 야박하게 평가를 내렸던 적도 많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때 나는 문제점을 빨리 보완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민망함이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 알겠다. 내가 왜 프로테스트 날에 그렇게 민망해하고 서운해 했는지. 처음 겪어보는 낯선 환경에 긴장하고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체육관이라는 공간을 떠나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며 프로 테스트를 준비해야 하는, 생에 처음 겪는 환경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집에서는 자기 세상인 것처럼 뛰놀고 작은 핀잔도 웃으며 넘기는 아들이, 처음으로 할머니 집에 갔을 때 쭈뼛거리고 작은 핀잔에 눈물을 터뜨려 버렸던 그런 느낌이었다.     



뭐든 처음 시작하면 애가 된다.


 나는 프로테스트 날 처음으로 할머니 집에 간 아이처럼 애가 되어버렸던 게다. 그래서 관장의 조금 야박한 이야기에 너무나 상처를 받은 게다. 그래서 결국 유치한 아이처럼 관장에게 무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게다. 비단 복싱만 아닌 것 같다. 뭐든 처음 시작하면 물리적 나이와 관계없이 애가 된다. 돌아보면 그렇다. 나는 글쟁이다. 이제껏 낸 책이 7권이 넘는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평가에 시달렸던가. 야박한 평가는 물론이고 근거 없는 비난과 인신공격까지. 그런데 지금 나는 근거 없는 비난과 인신공격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을까? 아니다. 첫 책을 내고 그 평가에 대한 글을 모조리 찾아 읽었다. 그리고 근거 없는 비난과 인신공격에 일일이 다 댓글을 달고 스스로를 변호하려 작은 애를 썼다. 첫 책을 냈을 때 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처음 겪는 일에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유역한 아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첫 해외여행도, 신입사원 시절도, 신혼시절도 돌아보면 다 마찬가지였다. 뭐든 처음으로 겪는 일 앞에서 여지없이 아이가 되었고, 그로 인해 필요 이상의 상처를 입기도 했고, 또 그 때문에 누군가에게 필요 이상의 상처를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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