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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질문은 의미가 없다.

수업을 해오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많이도 받았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모든 질문은 의미가 없다. 같은 질문이라하더라도 거기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물을 때 세 가지 마음이 있다. 지적 호기심의 마음, '너'를 사랑하는 마음, '나'를 보호하려는 마음. 


 “모든 것에 얽매이지 말라” 어느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그때 세 사람이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얽매이는 게 뭐죠?" 첫번째 사람은 순수하게 '얽매임'이라는 개념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질문했다.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지적 호기심의 질문은 앎을 축적할 수 있을진 몰라도, 삶을 바꾸긴 어렵기 때문이다. 비대해진 앎이 하나의 삶도 바꾸지 못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얽매이는 게 뭐죠?” 두 번째 사람 역시 이렇게 물었다. 이 사람은 스님을 사랑해서 질문을 했다. 스님의 말씀에 다시 질문을 함으로써 스님에게 인정받고 관심받고 싶었다. 더 나아가 그 스님이 보았던 세계를 자신 역시 느껴보고 싶은 마음으로 질문했다. 이 역시 의미가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질문은 의미 없다. 아무런 질문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비언어적으로 모든 것을 알게 해준다.(불립문자不立文字!)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얽매이는 게 뭐죠?” 세 번째 사람도 이렇게 물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질문을 던졌다.  “이런 저런 것에 얽매여 사는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비루하고 싫은 '나'이지만, 그 '나를' 정당화해보려고 이러저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이것 역시 의미가 없다. 아니 이것은 최악의 질문이다. 사실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다 유아적 어깃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어깃장은 '앎'도 아니고 '스님'도 아니고 정당화하려는 비루한 ‘나’만 보는 질문이다. 이는 스님도 피곤하게 하고, 질문을 하는 이 역시 더욱 피로해지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지며 살아왔을까? 지적 호기심이라는 그럴듯한 방어막 뒤에서 숨어서 비루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질문만 던지며 살아왔던 것 아닐까? 그런 겹겹의 기만적 질문 속에서 한 사람을 사랑해서 질문을 던지는 일은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외로움 속에 던져버린 것 아닐까?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해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을까? 모든 질문은 의미 없지만, 가장 가성비 좋은 질문은 있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던지는 질문. 그 질문을 통해 우리는 앎도, 삶도, 기쁨도 모두 챙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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