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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아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둘은 서로를 좋아했다. 하지만 종종 삐걱거렸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러 저런 감정을 쏟아내었다. 가족, 직장, 친구 문제 등등으로 자신 안에 응어리져 있던 분노, 짜증, 외로움 등을 쏟아내었다. 여자는 그저 들어주었다.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생각했다. 가장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있는 어둠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자도 지쳐갔다. 어두운 이야기는 슬픔이고, 슬픔은 필연적으로 한 사람을 마모시키고 소진시킨다. 여자의 한 숨을 늘어갈 때, 남자는 더욱 예민해졌다. 남자는 여자에게 마저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져 더욱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여자의 한숨과 남자의 불안은 결국 크고 작은 다툼으로 번졌다. 다툼이 있은 후에 남자는 여자에게 미안했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했으니까. 또 그녀가 누구보다 자신을 더 이해주고 안아주려 했던 이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을 때면, 술을 진탕마시고 그녀에게 섹스를 청했다. 여자는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남자가 좋았고, 좋았던 만큼 안쓰러워보였으니까. 여자는 그것이 남자의 '사과'였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과' 후에,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응어리진 감정을 쏟아내고, 크고 작은 다툼이 있고, 다시 ‘사과’를 반복했다. 남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감정만을 보고 있는 이는 상대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    


 남자는 자신의 반복된 ‘사과’가 여자를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슬픔의 나락으로 밀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대주는 년이야?” 반복된 일방적 '사과'에 여자는 지쳐 절규하듯 말했다. 남자는 자신의 미안함만을 볼뿐, 긴 시간 쌓였던 여자의 상처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여자는 지쳐버려 마모되었다. 남자의 ‘사과’는 상처다. 이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준 상처가 아니다. 남자는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했으니까. 그 상처는 자신의 감정만을 보느라, 상대의 감정을 섬세하게 살피지 못해서 준 상처다.      


 자신의 감정만 보는 일들은 가볍게 사과한다. “보고 싶어, 미안해” 그 사과는 독이 있는 치료제다. 사용하면 치료되지만, 반복해서 사용하면 몸에 독성이 쌓이는 치료제. 그 치료제는 써야할까? 쓰지 말아야 할까? 사랑은 한 달음에 달려가서는 안 된다.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걸어야 한다. 지금 걷는 한 걸음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심코 내디딘 한 발에 다시 걸을 수 없게 얼음을 깨져버릴 테니까 말이다. 절규했던 여자는 깨어진 얼음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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