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천 개의 고원>을 끝내며

1.

비천어검류는 자유의 검이다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기 위한 것일 뿐결코 권력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바람의 검심     


 ‘비천어검류’는 최고의 검술이다. 이 검술을 가르쳐 준 스승은 제자를 꾸짖는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권력에 관여해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인 악귀 같은 암살자로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스승은 말한다. ‘비천어검류’는 자유의 검이다. 그 검은 자유를 박탈당해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서 사용해야지 권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스승은 통찰이 있다. 어떤 권력이건, 권력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기는커녕 늘 명분을 앞세워 세상사람들을 더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승의 통찰 충분한가? 문文만 알고 무武를 모르는 이들의 식견이 충분치 않는 지점이 있는 것처럼, 무武만 알고 문文을 모르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은 무武에 정통할 뿐, 문文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스승의 통찰은 조금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천개의 고원’은 자유의 검(무기!)이다. 이는 비유가 아니다. 들뢰즈는 ‘도구’와 ‘무기’를 구분하며 한 권 책 역시 앎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삶을 바꿀 ‘무기’가 되기를 바랐다. ‘천 개의 고원’이 검술이라면, 그것은 명실공히 현존하는 최고의 검술 중 하나다. ‘천 개의 고원’은 문文-무武의 ‘다중체’다. 천개의 고원은 문文이 ‘극한’을 지나 ‘문턱’을 넘어 무武의 배치로 탈영토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천개의 고원'을 읽고 또 가르치며 숨이 턱까지 차올랐던 이유였을 테다. 무武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문文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문文-무武 ‘다중체’는 몸과 머리를 모두 사용해서 익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들뢰즈’라는 말 안에 ‘가타리’라는 말은 포함된다. 가타리 역시 이 부분에 동의했다.)는 왜 이 문文-무武의 ‘다중체’를 우리에게 알려주었을까? '비천어검류'를 제자에게 알려준 스승의 마음과 같았을 테다. 누군가 그 자유의 검을 통해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테다. 진정한 인문주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비천어검류'(武)의 스승이 아니라, '천개의 고원'(문文-무武 ‘다중체’)의 ‘들뢰즈’라는 스승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까? 자유의 검을 가지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는 일이 아니다. 가장 먼저 묶여있던 자신을 구해야 한다. 자신을 구하지 않고 어찌 타인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지 않고 타인을 구하려했던 그 수많은 선한 이들이 결말이 어찌되었는가? 자신이 쥐었던 검이 자신을 해하고, 결국은 타인까지 베지 않았던가. 자신을 구하지 않는 자, 타인을 구할 수 없다. 그러니 자유의 검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세속적 욕망으로 얼룩진 자신의 속박을 끊어내는 일이다. 그 자유의 몸으로 세상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어느 스승의 말처럼, 자유의 검은 자유이기에 권력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비겁함이고 기만이다. 국가장치가 있는 한 자유는 언제나 억압(복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잘해야 봐야 자발적 복종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는 ‘국가장치’에 맞서 ‘전쟁-기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천개의 고원’은 ‘전사’가 되기 위한 ‘무기(비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가장치(권력)에 개입할 것인가? 국가장치 '앞에' 서야 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파괴적 두려움이고 만용이다. 국가 장치 앞에서 서야한다면, 천개의 고원은 최고의 비기일 수 없다. 그런 자기파괴적인 검술은 너무 흔하지 않는가. 국가장치에 개입하는 지혜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국가장치와 전쟁-기계 ‘사이’를 지나가는 일이다. 필요하면 국가적 장치를 가져다쓰고, 또 필요하면 전사로서 전쟁-기계로서 싸울 수도 있다. 마치, 적진 한 가운데서 때로는 적군처럼, 때로는 아군처럼 싸우는 게릴라전처럼 말이다. 그 싸움의 문은 ‘나’를 해방하고, ‘너’를 해방해서 생긴 ‘우리’의 해방의 공간에서만 열린다. 들뢰즈는 그 지혜로운 싸움의 비기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길었던 ‘천개의 고원’을 끝내며, 들뢰즈라는 스승에게 배웠던 무기로, 어느 스승의 모자란 가르침을 이렇게 ‘덧대고’ 싶다.     


“<천개의 고원>은 자유의 검이다그 검으로 가장 먼저 너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하라그 자유의 몸으로 사람들마저 고통해서 구하라그 해방된 공간의 문으로권력 가장 깊숙한 곳으로 침투해서그 곳마저 해방하라!”           



2.

길고 길었던 네 달의 수업이 끝났다. ‘천개 고원’은 넘지 못했다. 아니 하나의 고원은 제대로 넘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후회도 미련도 없다. 이 수업은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들뢰즈의 가르침을 정말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천개의 고원을 넘었는지는 넘지 못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점!) 고원과 고원 ‘사이’를 가로지르며 ‘천개의 고원’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니까,(선!) ‘봉우리’가 아닌 ‘고원’의 기쁨은 그렇게 (‘점’이 아닌) ‘선’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이번 수업이 나의 자부심인 이유가 또 있다. “카드 돌려막기 하는 기분이다.” 제자가 이번 수업이 힘드냐고 물었을 답했다. 정말이었다. 매주 목요일은 어찌 그리 빨리 돌아오는지. 월요일부터 수업 생각 때문에 온 마음이 곤두서있었고, 수업 준비를 할 때면 전력 질주를 하는 것처럼 거친 호흡을 내뱉었고, 수업 끝나면 마치 온 힘을 쥐어짜서 상대와 치고받는 스파링을 끝낸 것처럼 소진되었다. 그렇게 이 수업을 끝냈다.    

  

 헉헉 대면서 글을 읽어본 적 있는가? 나는 늘 두려웠다. 편안한 유리 방안(텍스트)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현실을 관조하고 있었던 것이며 어쩌지? 혹여 나 역시 내가 그리도 비난했던 지적 허영에 빠진 선생들처럼 될까봐 걱정하며 지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은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으면 곧바로 절벽이다. 그렇게 철학하는 체하며 절벽에 아래로 떨어진 이들을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하지만 이제 그런 두려움과 걱정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시간을 통째로 쏟아 부으며,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며 '천개의 고원'을 읽어나갔던 경험 덕분이다. 온 몸으로 공부하며 가르쳤다. 네 달 동안 정말 그랬다. 유리방안에서 나와 온 몸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철학했던 시간들은 나의 자부심으로 남았다. 허영은 오직 고통으로만 걷어낼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유보다 더 큰 자부심이 있다. 이 수업을 함께 해준 분들이다. 네 달 동안 수업을 들어준 분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천개의 고원’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독한다는 것은 사실 미친 짓에 가깝다. 그 난해하고 복잡하며 강밀한 텍스트들을 어떻게 철학적 훈련을 거치지 않는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그 수업을 직장에서 고된 일을 끝내고 듣는다고? 그것은 미친 짓이라기보다 고문에 가까운 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깜냥껏 잘 설명하려 애를 썼지만 어찌 그것이 충분할 수 있었을까? 나만큼이나 수업을 들어준 분들 역시 고되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준 초롱초롱한 한 명 한 명의 눈빛들은 나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그 눈빛들이 내 마음에 자부심이 되었다. 들뢰즈가 그토록 강조했던 유목은 혼자 할 수 없다. 유목 역시 배치이고, 배치는 함께이니까. 그런 면에서 이 수업은 정말 함께해야만 하는 수업이었고, 함께 여행했던 고원의 풍경들은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천개의 고원’을 끝내며 내게 쌓였던 자부심으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제 ‘점’을 찍었으니 다시 ‘선’을 그리며 나아가려 한다. 언제나 그랬듯, 제자들을 다그쳤던 말은 나를 다그치는 말이다. “멈추면 조땐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개로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