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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을 좋아하는 이유

“아빠는 무슨 색이 좋아?”

“아빠? 파란색?”

“왜 파란색이 좋아? 나는 노란색이 좋은데.”

“글쎄”


 바다 앞에서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철학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철학이 내게 알려준 것들이다. 하지만 철학이 결코 알려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오직 자연과 예술만이 알려줄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파란색을 좋아했다. 어떤 철학책도 그 이유에 대해 알려주지 못했다. 이러전 저런 전시회를 전전하며, 그리고 바다를 몇일째 바라보다 알게 되었다. 내가 왜 파랑색을 가장 좋아했는지. 


 파랑은 우울의 색이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우울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커녕 인지하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우울은 남자답지 못한 것이라 여겨서였고, 나이 들어서는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우울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인지하고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늘 검푸른 우울 속에 있었다. 



 파랑에 끌리는 나는 우울함에 끌리는 사람이었을까? 아니었다. 어느 전시회의 파랑에 우두커니 멈춰서 있다, 그리고 바다 앞에서 멍 하니 서 있다 알았다. 나는 긴 시간 우울과 청명 사이를 횡단하고 싶은 사람이었구나. 파랑은 묘한 색이다. 파랑은 짙어지면 검푸른 색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파랑은 햇살 아래서 청명한 파란 색이 된다. 전자가 음습한 늪 같은 우울의 색이라면, 후자는 바다 같은 청명의 색이다.     

 

 우울이 없다면 청명은 없다. 왜 그런가? 우울은 진지하게 삶을 살아내려는 자들의 숙명과도 같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지하게 삶을 살아내려는 자들이 우울에 잠식당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이다. 하지만 청명은 다르다. 청명은 밝고 유쾌한 기쁨이다. 청명한 바다 앞에서 우리의 마음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울과 청명은 전혀 상관없는 혹은 서로 모순되는 감정일까? 그렇지 않다. 우울이 없는 청명(밝음, 유쾌, 기쁨)은 경박함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울을 피해 도착하려 했던 청명은 한없이 가벼운 삶일 뿐이다. 그 경박한 삶은 다시 검푸른 우울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파랑은 우울과 청명 사이에 있다. 언제든 둘 사이를 횡단하다. 파랑은 진지하기에 우울을 피할 수 없지만, 바로 그 진지함 때문에 우울에 잠식당하지 않고 밝고 유쾌한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다. 파란색은 검푸른 우울을 품고, 푸른 바다처럼 청명하게 살아가려는 자의 색이다. 이것이 내가 파란색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나는 검푸른 우울을 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청명한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철학'하는 삶을 택한 나는 '예술'과 '자연' 속에서 머물러야 한다. 철학이 알려주지 못하는 것들은 오직 예술과 자연만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우울과 청명 사이를 유쾌하게 횡단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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