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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왜 자살했을까?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1.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누가 자살을 윤리적 문제로 환원하는가? 자살은 윤리적 문제인가? 이보다 더 무책임한 문제제기도 없다. 자살이 윤리적 문제로 환원될 때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자살 역시 개인의 선택 문제로 남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자살은 지성적 차원의 문제다. 자살은 무지한 짓이다. 왜 자살하는가? 삶의 조건이 부정적이기 때문 아닌가? 왕따를 당해서. 취업이 안 돼서. 사업이 망해서. 빚이 많아서. 외로워서. 우울해서. 이 모든 자살의 이유들은 비지성적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안다. 자신에게 현재 주어진 삶의 조건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묻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긍정적이라고 믿었던 삶의 조건은 하나의 마주침으로 부정적인 것이 되고, 부정적이라고 믿었던 삶의 조건 역시 하나의 마주침으로 긍정적이 된다. 이것이 지혜로운 이들은 자살하지 않는 이유다. 하나의 마주침으로 삶의 조건은 전혀 달라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삶은 ‘-되기’이고 ‘아장스망’(배치)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면, 마주침이 있고 그 마주침으로 인한 추가‧전치‧변환되는 항들 배치를 통해 삶의 조건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혼란스럽다. ‘-되기’의 철학을 체계화했던, 누구보다 삶의 긍정했던 철학자, 들뢰즈의 자살 문제를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1995년 11월 4일, 들뢰즈는 스스로 산소 호흡기를 벗고 투신자살했다. 들뢰즈는 무지했던 걸까? 성급하게 답하기 전에 들뢰즈의 자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들뢰즈는 나이가 든 상태에 노환이 와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아파트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적으로 몸이 움직일 수 있었던 들뢰즈는 산소 호흡기를 벗고 베란다로 기어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철학적 이론으로 그의 자살을 해명할 수 있다.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체는 일말의 마주침의 가능성마저 없다고 판단했을 테다. 그러니 들뢰즈에게 자살은 살아 있는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었을 테다. 하지만 이대로 들뢰즈의 자살을 긍정해도 좋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의 자살 역시 긍정해야 하는가? 그가 자살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역시 들뢰즈처럼 살아 있는 채로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며 긍정해주어야 할까? 그 역시 스스로의 의지로 신체를 움직일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이는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일이다. 



2.

 이제 우리는 들뢰즈의 자살과 전신마비가 된 이의 자살을 구분해야 한다. 먼저 들뢰즈는 생전에 죽음과 자살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직접 들어보자. 


 "모든 죽음은 이중적이다먼저 죽음은 커다란 차이의 말소에 의해 일어나고이런 말소는 죽음을 통해 외연의 차원에서 표상된다하지만 죽음은 다른 한편 작은 차이들의 우글거림과 해방에 의해 일어나고이 해방은 내적인 죽음을 통해 강도 안에 함축된다. (중략죽음은 안으로부터 의지되지만언제나 바깥으로부터 오고수동적이고 우연한 어떤 다른 형태를 통해 온다자살은 모습을 감추고 있는 그 두 얼굴을 일치합치시키려는 어떤 시도이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들뢰즈에 따르면 죽음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다. 차이의 말소에 의해 일어나는 죽음 그리고 차이들의 우글거림과 해방에 의해 일어나는 죽음. 자살 역시 죽음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자살에도 두 가지 층위의 자살이 있다. 차이의 말소에 의한 자살과 차이의 우글거림과 해방에 의한 자살.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차이’는 무엇과 무엇의 차이냐? 그것은 바로 ‘안’과 ‘밖’의 차이다. 죽음은 우리 ‘안’에 있다.(죽음본능) 하지만 이는 반드시 ‘밖’으로부터 온다.(부정적 삶의 조건) 자살은 그 안과 밖으로 합치시키려는 시도이다. 두 층위의 자살은 안과 밖을 합치시키려는 방식에 의해 구분된다.


 차이의 말소에 의한 자살은 무엇인가? ‘죽음본능’(안)과 ‘부정적 삶의 조건’(밖) 사이의 차이를 제거한 자살이다. (차이를 제거해서 안과 밖을 합치) 이는 삶에 압도당한 자살이다.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는 죽고 싶을 수밖에 없다. 극한의 ‘부정적 삶의 조건’과 그것이 양산하는 ‘죽음본능’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절망감)은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자살을 한다면, 그는 차이의 말소에 의한 자살을 선택한 셈이다. 이런 자살의 욕망은 정말 전신마비가 된 이만 갖고 있을까? 아니다. 삶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다 때려 치고 싶고 회피하고 싶고, 깔끔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이 들지 않는가? 밀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는 차이의 말소에 의한 자살의 욕망과 근본적으로 같다. 이는 결코 긍정될 수 없는 자살이다. 


 차이의 우글거림과 해방에 의한 자살은 무엇인가? ‘죽음본능’과 ‘부정적 삶의 조건’ 사이를 지나가는 자살이다. 이는 차이의 우글거림 속으로 들어가 해방되는 자살이다. 이는 삶을 압도하는 자살이다. 들뢰즈는 왜 자살했을까? ‘부정적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죽음본능’에 잠식당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들뢰즈는 그렇게 허접한 철학자가 아니다. 들뢰즈는 노쇠한 신체로 이제 새로운 차이(마주침)을 마주할 가능성이 없음을 직감했을 테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들뢰즈는 다시 차이의 우글거림 속으로 들어가려 했을 테다. 신체를 벗어나 원자와 분자로 자연 안으로 다시(반복) 돌아가 우글거리는 차이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해방한 것이다. 그의 주저는 누가 뭐래도 『차이와 반복』이다. 들뢰즈는 그 사유도 그의 삶도 ‘차이와 반복’이었으니까 말이다.


 ‘부정적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죽음본능’에 잠식당했는가? 삶이 힘들어 죽고 싶은가? 지랄 떨지 말고 살라! 삶에 압도당했다면 살아야내야 할 시간이다. 전비마비가 되어 자살하려는 이에게도 우리는 강건하게 그리 답해주어야 한다. 일단 살아라! 언제까지 살아내어야 하는가? ‘부정적 삶의 조건’과 ‘죽음본능’ 사이를 지나갈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내야 한다. 그 차이의 긴장감을 견디며 살아낼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그 긴장감을 견디며 살아 있다는 건, 하나의 마주침이라도 만날 가능성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항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 죽어야 하는가? 삶을 압도했을 때다. 삶을 압도하면 죽음은 두렵지 않다. 인간은 차이가 우글거리는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유한한 신체로 더 이상 차이의 마주침을 생성할 수 없다면 신체를 버리고 다시 차이를 찾아 떠나야 한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죽지 말아야 할 때 악착같이 살아가는 일이며, 죽어야 할 때 차분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죽고 싶다. 삶을 압도해서, 살아 있는 채로 죽고 싶다. 삶을 잘 살아내어서 때가되면 우글거리는 차이 속으로 나를 해방하고 싶다. 죽어 있는 채로 살아왔던 시간을 지나, 살아 있는 채로 살아가는 시간을 지나, 끝내는 살아 있는 채로 죽고 싶다. 그것이 한 인간으로서, 한 명의 철학자로서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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