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와 '너'와 '예술가'

1.

전시회를 종종 간다. 철학을 공부하며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다.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아는 것은 명확하지만 명확한 것은 삶의 진실이 아니다. 느끼는 것은 모호하지만 바로 그 모호한 것이 삶의 진실이다. 이것이 내가 전시회를 자주 가는 이유다. 나는 예술을 잘 느끼지 못한다. 아쉽게도 내겐 그런 섬세한 예술적 감수성이 없다. 예술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느끼지 못하게 된 신체를 끌고 무엇이라도 느껴보려는 발버둥 같은 것이다. 그렇다. 예술을 만나러 가는 길은 수행에 가까웠다.      


 혹자들은 전시회가 즐거움이라 했지만 내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시회는 내게 즐거움의 공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통의 공간에 가까웠다. 언어 없는 모호한 공간은 답답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전시회를 다녀온 날은 기묘한 좌절감에 빠져야 했다. 뭐든 ‘하면 된다!’는 말은 거짓이지만, 뭐든 ‘하면 는다!’는 말은 진실이다. 나같이 후진 예술적 감수성을 가진 이도 전시회를 계속 가다 보니 뭔가 느껴지는 것이 생겼으니까 말이다.     


 그림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그림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 그림을 통해 촉발된 자신의 감정을 보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그림을 느낀다는 건, 그 그림을 그린 예술가의 감정을 느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가의 감정에 자신의 감정을 공명synchronize시켜 보는 일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감정’과 구분하여 ‘감응’이라는 근사한 표현으로 개념화 했다. 화가의 그림을 통해 직접적으로 촉발된 느낌은 '감정'이고, 그림을 통해 화가의 '감정'을 느꼈다면 '감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사실을 깨닫고 알게 되었다. 사랑하지 않는 예술가의 작품은 느껴볼 없다는 사실을. 사랑하지 않는 이의 감정에 자신의 감정을 공명synchronize(동조화!)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니 아니끼 때문이다. 그림에 끌려서 그의 삶을 살펴본 것일까? 그의 삶에 끌려서 그림을 살펴본 것일까? 아니면 전자와 후자가 동시적이었을까? 순서와 인과를 알지 못한 채로 한 예술가에게 매혹될 때가 있다. 그 예술가에게 매혹되었을 때와 매혹되지 않았을 때 그의 그림은 내게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이것이 내가 전시회를 다니며 조금이나마 예술에 대해 깨닫게 된 지점이다. 



2.

하지만 이제 작품을 보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림 앞에 서면 예술가와 나는 마주 보고 있는 셈이다. (화가-그림-나) 그렇게 예술가와 나는 공명한다. 그때 나는 '감응'하여 무엇인가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전시회에 소중한 이와 함께 간 적이 있다. 이미 몇 번을 와본 전시회라 나는 조금 여유 있게 뒤쪽으로 걸었다. 


 그때 놀라운 경험을 했다. 같은 작품이 다시 다르게 보였다. 소중한 이가 그림을 보는 모습을 뒤쪽에서 바라볼 때였다. ‘너’가 '그림'을 보고 있는 장면이 다시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느껴졌다. (화가-그림-너-나) 그 후로 다시 '화가-그림-나'로 그림을 보았다. 그 그림은 예전에 '화가-그림-나' 로 보았던 그림이 아니었다. 또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유를 안다. 세 개(화가-그림-나)의 파형이 아니라, 네 개(화가-그림-너-나)의 파형이 공명했기 때문이었을 테다.  이후로 그 그림은 내게 더 깊고 넓은 느낌을 주었다. 세 개의 파형의 공명과 네 개의 파형의 공명은 전혀 다른 '감응'을 준다. 마치 다양한 선율이 공명해서 깊은 감동을 주는 음악처럼 말이다. ‘나’와 ‘너’와 ‘화가’ '그림'이 공명할 그것은 '음악'이 된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같이 조악한 예술적 감수성을 가진 이가 예술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끼려면 사랑밖엔 길이 없다. ‘예술가’를 사랑하거나, 예술을 사랑하는 ‘너’를 사랑하거나, 사랑하는 ‘너’가 예술을 사랑하거나, 아니면 ‘예술가’를 ‘나’와 ‘너’가 함께 사랑하거나. 수행처럼 전시회를 다닌 보람이 있다. 내 나름으로 예술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 삶도, 나의 철학도 어느 날엔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경박충'과 '진지충'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