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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마음의 상흔이다.

피해의식은 겁이다.

피해의식은 비난의 대상일까?     


“그거 너 피해의식이야.” “너 진짜 피해의식이 심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기분이 어떨까? 어떤 이는 불쾌함을, 또 어떤 이는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왜 불쾌함 혹은 분노의 감정을 느낄까? “그거 너 피해의식이야!”이란 말에서 비난의 정서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 피해의식이란 말은 결코 긍정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객관적 진단을 가장한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 ‘피해의식’이란 말은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일반론으로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긍정적 가치로 통용되는 대상(이해심‧포용력‧성숙함)을 비난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건 너의 성숙함(이해심‧포용력) 때문이야” 이런 표현으로 누군가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오직 사회적으로 부정적 가치로 통용되는 대상(독선‧무관심‧폭력성)을 통해서 누군가를 비난한다. “그건 네가 독선적(무관심‧폭력적)이기 때문이야” 이런 표현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한다. 그러니 ‘피해의식’이란 말이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피해의식’이란 것을 이미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 내리고 있다는 의미다.      


 피해의식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이 질문부터 해야 한다. 피해의식은 세상 사람들의 믿음처럼, 정말 나쁜 것일까? 즉, ‘피해의식’이란 것이 누군가를 비난할 때 사용할 만큼 부정적인 가치인가? 먼저 피해의식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피해의식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특정한 피해를 받아서(혹은 받았다고 믿어서) 생긴 상처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호선’의 피해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호선’은 어린 시절부터 뚱뚱하다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여느날처럼 ‘호선’이 친구들과 식사 중이었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말했다. “살찐 사람들은 좀 게으른 측면이 있지 않나?” 친구의 그 이야기는 ‘호선’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선’은 불쾌함과 분노에 휩싸였다.      


 ‘호선’은 그 불쾌함과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살찐 거랑 게으른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호선’은 분명 ‘피해의식’이 있다. ‘호선’이 두 친구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들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낸 것은 그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묻자. ‘호선’의 피해의식은 나쁜 것인가? 달리 말해, ‘호선’이 느꼈던 불쾌함과 분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부정적인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피해의식은 겁이다.


‘피해의식’의 기본적인 작동원리는 ‘겁’의 작동원리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경필’이는 겁이 많은 아이다.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들었을 때, 화들짝 놀라며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방어 자세를 취하기 일쑤다. ‘경필’이는 왜 겁이 많아졌을까?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 앞에서 손을 들기만 하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깜짝 놀라며 방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겁’은 무엇일까? 반복되었던 육체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일종의 자기보호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피해의식’의 작동원리는 ‘겁’의 그것과 정확히 같다. 피해의식 역시 일종의 자기보호 장치다. ‘겁’이 반복된 육체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기보호 장치라면, ‘피해의식’은 반복된 정서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기보호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살찐 사람들은 좀 게으른 측면이 있지 않나?” 상대의 진의와 상관없이, 이 말에 ‘호선’이 불쾌함과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호선’이 그 말을 듣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호선은 어린 시절 뚱뚱하다고 놀림 받고 혼자 울기만 했던 그 시절로 '호선'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말이다. 상대의 진의를 파악할 새도 없이 터져 나오는 ‘호선’의 불쾌함과 분노는 그렇게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다는 절박한 바람이다.           


피해의식은 마음의 상흔이다.     


누가 ‘경필’에게 “넌 겁쟁이야!”라고 손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누가 ‘호선’에게 “넌 피해의식 덩어리야!”라고 간단히 비난할 수 있을까? ‘경필’에게 겁내지 말라는 말은 ‘넌 계속 맞으면서 살아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겁’이라도 있기때문에 '경필'은 그나마 한 대라도 덜 맞거나 빗맞을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호선’에게 피해의식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 계속 상처받으며 위축된 상태로 살아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피해의식이라도 있기때문에 뚱뚱하다는 이유로 상처받은 아이를 겨우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겁도 피해의식도 모두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았기에 생긴 의식구조다. 그래서 피해의식 그 자체는 부정적인 가치도 아니고 비난의 대상도 아니다. 누군가 한 사람의 겁과 피해의식을 비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야, 그게 뭐 겁낼 일이야.” “그건 네 피해의식이지.” 우리 사회가 겁과 피해의식을 손쉽게 부정적 가치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감수성이 빈약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망적인 일이다.      


 피해의식은 나쁜 것도, 부정적인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될 일도 아니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 깊은 상처가 반복되어서 긴 시간 아물지 않는 피딱지 같은 상흔. 한 사람의 상흔(피해의식)을 볼 때 흉터(부정적)를 보지 말고, 그 상흔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상처(고통)를 먼저 보아야 한다. 겁이 많은 아이는 다치지 말고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피해의식이 많은 이 역시 마찬가지다. 차가운 말로 다그치기 전에 '피해의식'을 진단하기 전에,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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