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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다.

피해의식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효과는 충분히 나쁘다.


피해의식은 근본적으로 자기보호 장치다. 앞으로 닥쳐올 크고 작은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생한 마음이 바로 피해의식이다. 그러니 “피해의식을 가지지마!”라는 말은 얼마나 공허하고 폭력적인가. 자신을 보호하려 하지 않는 생명체는 없다. 상처를 받으면 누구나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건강함이다. 그러니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라는 말은, 생명체로서의 본성을 버리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가.      


 또한 그 공허한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만 과 몰입해있을 뿐, 다른 사람의 상처에는 관심이 없어서다. 즉, 반복된 피해로 인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보호하려는 한 사람의 삶의 맥락을 전혀 살피지 않아서다. 그러니 ‘피해의식 가지지 말라’는 세상 사람들의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타인에게 관심도 없는 이가 타인의 삶에 함부로 말하는 것보다 더 큰 무례와 폭력도 없다. 


 피해의식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상처가 나면 피딱지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에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피해의식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그것이 만들어 내는 효과는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피해의식은 그 효과적인 측면에 매우 부정적이다. 쉽게 말해, 피해의식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닐지라도, 그것이 우리네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나쁘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삶에 크고 작은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왜 그런가? 여기서 피해의식을 다시 정의할 필요하다.

      


피해의식은 피해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피해의식은 무엇인가? 피해의식은 피해 받은(혹은 받았다고 믿는)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이것이 피해의식의 적확한 정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도한’이다.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이 왜 크고 작은 불행을 초래하는지 알 수 있다.      


 ‘선빈’과 ‘수철’이 있다. 이 두 아이는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상처를 갖고 있다. 두 아이 모두에게 그 끔찍했던 상처(피해)는 결코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두 아이가 각자의 상처(피해)를 다루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선빈’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두 세 번씩 주변을 살핀다. 이는 당연하며 동시에 건강한 일이다. 상처(교통사고) 받았던 아이가 자기 나름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기억을 갖고 있는 ‘수철’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수철’은 그 사고를 당한 뒤로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 역시 이해 못할 바도 없지 않은가? ‘수철’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다시 교통사고를 당할 리도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수철’ 역시 자기 나름으로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수철’의 자기방어에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건강함이라고 볼 수 없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크고 작은 불행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철’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과도하게 자신을 지키려 한 대가로 바다의 시원함도, 꽃의 향기도, 산 정상에서 만끽할 수 있는 경치도 느낄 수 없을 테다. 그뿐인가? 인생을 살아가면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낼 친구를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다 오히려 그 상처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서글픈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이다. 집 밖에서 나오지 못하면 결국은 영원히 지난 상처만 되새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는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과도한’과 ‘적절한’ 차이


 반면 ‘선빈’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한 동안은 집 밖을 나설 때 마다 두려울 테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쿵쾅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주변을 몇 번이나 살펴야 할 테다. 그렇게 집 밖으로 나서 횡단보도를 지난 어딘가에서 ‘선빈’은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선빈’은 그녀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러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그 매혹적인 순간들 덕분에 ‘선빈’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 조차 종종 잊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쁜 삶인가.

  

 ‘선빈’과 ‘수철’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도한’에 있다. 둘 모두 지난 상처(피해)로부터 자기방어를 하려고 했다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선빈’은 적절한 자기방어를 했고, 수철은 과도한 자기방어를 했다. 달리 말해, ‘선빈’과 ‘수철’의 차이는 피해의식의 유무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선빈’은 피해의식이 없고, ‘수철’은 피해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피해의식은 피해(상처)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이렇게 우리네 삶을 부정적 효과를 미친다. 피해의식은 피해 받았기 때문에 생긴 의식구조이기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이기 에 그 효과적인 측면에서 매우 나쁘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불행한 삶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의 부정적 효과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달리 말해, 피해의식은 우리네 삶을 어떻게 불행으로 몰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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