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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충'과 '진지충' 사이

삶은 너무 가벼운 것도 아니고, 너무 무거운 것도 아니다.
철학이 끝내 도달해야 할 곳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곳이다.



“요새 몸이 안 좋네요.”
“니가 뭐한다고 몸이 안 좋노?”
“사람들 힘든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가 봐요.”
“감기네. 지랄하지 말고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약 타무라.”     

 

 어머니의 타박을 듣고 한참을 웃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문답을 깨달았을 때의 웃음이었다. 마음이 번쩍하고 깨달았기에 후련해지는 기쁨의 웃음. 나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진지충’이라는 조어가 있다. 어떤 주제이든 과도하게 심각하고 무겁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또 그렇게 표현하는 이를 폄하하는 말이다. 이는 어떤 주제이든 단순하고 가볍게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요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조어일 테다. 하지만 ‘진지충’이 있다면, 그것만큼 ‘경박충’의 유해함 역시 다루어져야 한다.


 ‘경박충’은 어떤 이들일까? 어떤 주제이든 과도하게 단순하고 가볍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또 그렇게 표현하는 이라고 정의하자. ‘진지충’과 ‘경박충’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많은 기준점 있겠지만 그중 ‘의미부여’의 측면이 둘의 가름하는 근본적 기준점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무엇인가?” ‘진지충’과 ‘경박충’에게 묻는다고 해보자. ‘진지충’은 뭐라고 답할까?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의 기준으로 답할 수 없으며,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은 행복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박충’은 뭐라고 답할까? “돈이지.” 둘은 왜 이토록 다른 답을 했을까? ‘진지충’은 인간과 삶에 관해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경박충’은 그 ‘의미부여’가 과도하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먹이’이자 ‘살충제’다. ‘진지충’을 번식시키는 ‘먹이’이고, ‘경박충’을 제거하는 ‘살충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주제이든 심각하고 무겁게 이해하려는 삶의 자세를 유지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철학을 하다보면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진지충’이 될 여지가 있다. 동시에 철학은 ‘경박충’을 제거한다. ‘행복=돈’으로 단순하고 가볍게 치환해버리는 삶의 자세는 철학하는 자에게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철학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의미부여가 결여된 ‘경박충’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철학하는 삶을 지나오는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진지충'이 되어 있었다. 인간과 삶, 세계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과잉된 감정과 관념에 빠졌던 시간이 있었다. 선배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가며, 힘든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과도하게 심각하고 무겁게 인간과 삶,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몇 주를 아팠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 고민을 내가 다 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과도한 의미부여로 인한 과잉된 감정과 관념에 혹사당한 몸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였다. 철학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길 없는 어머니는 내 상태를 가볍게 진단했다. "지랄하지 말고 병원가라" 때로 가벼운 진단은 이토록 날카롭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아, 내가 진지충이 되었구나!’ 순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몸이 아프면 잘 먹고 잘 쉬고 병원에 가면 될 일이다. 그 단순한 사실이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삶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온 통 과잉된 감정과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진지충'을 조롱하지만, 철학하는 이들은 '경박충'을 조롱한다. 둘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 '진지충'도 '경박충'도 모두 문제다. '경박충'은 불행하다. 의미부여가 과도하게 결여된 삶은 진지한 사유와 성찰이 부족해서 불행지기 때문이다. '진지충'은 불행하다. 의미부여가 과도한 삶은 과잉된 감정과 관념으로 인해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 모두 기쁜 삶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철학하는 삶은 ‘경박충’을 박멸하는 삶도 아니고, ‘진지충’을 번식시키는 삶도 아니다. 철학은 씩씩하고 유쾌한 삶을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철학은 ‘경박충’과 ‘진지충’ 사이를 지나가는 일이다. 삶이 너무 가벼울 때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서 진지한 사유와 성찰을 하고, 삶이 너무 무거울 때는 과도한 삶의 의미부여를 걷어내고 즐겁고 신나는 일을 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삶, 너무 무겁지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삶 속에서 살아야한다.


 '경박충'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사는 벌레이고, '진지충'은 컴컴하고 음습한 땅속에 사는 벌레이다. 철학하는 이가 사는 곳은 허공도 아니고 땅속도 아니다. 철학하는 이는 땅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다. 씩씩하고 유쾌한 삶은 오직 땅위에만 있다. 그곳에만 바람과 꽃과 달처럼 사랑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땅위에서 살라! 지랄 떨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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