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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삶의 '그로기'에서 벗어나는 법

그로기는 자괴감이다.


쾅, 카운터펀치


링에서 상대와 마주는 것도, 강도 높은 스파링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갈 즈음이었다. 다른 체육관 선수와 스파링을 했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선수와 스파링이라 긴장이 되긴 했지만 그것도 이제 나름 적응이 되었다. 경직되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일 수도 있었고, 상대 주먹을 끝까지 지켜볼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 움직임에 맞춰 공격할 수 있는 기회도 포착할 수 있었다. 3라운드가 끝나갈 때 즈음이었다. 상대가 지친 듯 숨을 헐떡거렸다. 기회다 싶어 펀치를 내기위해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바로 그때였다. 쾅!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펀치를 냈다. 카운터 펀치였다. 상대가 앞으로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펀치를 내는 걸 카운터펀치라고 한다. 이 카운터펀치는 일반적인 펀치보다 충격이 훨씬 크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들어가는 힘에 상대 펀치의 힘까지 더해진 충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순간, 별이 번쩍했다. 통증보다 당황스러움과 긴장감이 몰려왔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몇 대를 더 얻어맞은 후 다행스럽게 공이 울려 3라운드가 끝이 났다.



물러서면 더 맞는다.


“형님, 하나 걸렸다고 뒷걸음질 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상대가 더 때리기 쉬운 거리가 되잖아요.” 코너로 돌아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내게 관장이 해준 조언이었다. 순간 짜증이 확 났다. 관장이 잔소리를 해서가 아니었다. 스파링을 몇 번이나 했는데 아직도 링에만 올라서면 잔뜩 쫄아있는 내 모습에 화가 나서였다.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 혼잣말로 되 뇌였다. “씨발, 이기지는 못해도 이제 쪽팔리게 뒷걸음질은 안 친다!” 호기롭게 마지막 4라운드를 시작했다.


 서로 잽을 던지며 거리를 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상대가 펀치를 내며 밀고 들어왔다. 상대는 기회를 잡은 듯 수도 없이 주먹을 내며 나를 몰아쳤다. 다짐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나보다. 긴장되고 겁은 났지만 턱을 땡기고 가드를 바짝 붙인 채 상대에게 돌진했다. 놀랍게도 상대의 주먹 횟수는 줄어들었고, 가드 사이로 보인 상대는 공격하느라 지쳐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상대는 뒤로 물러섰고 폭풍 같았던 상대 공격은 멈춰버렸다. 스파링이 끝난 후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녹화된 스파링 동영상을 돌려보았다. 첫 번째 별이 번쩍했던 펀치를 맞고 나서 꼴사납게 엉덩이를 뒤로 빼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뒤로 빼느라 상대와 멀어진 거리는 상대가 후속타를 더 때리기 딱 좋은 거리였다. ‘뒤로 빼면 더 얻어터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되었다. 동시에 상대가 몰아칠 때 두 눈을 질끈 감고 쏟아지는 주먹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왜 상대의 공격이 멈추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상대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거리가 좁혀져 더 이상 때릴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기에서 벗어나는 법


상대가 공격을 몰아칠 때, 순간 정신이 잃게 되는 걸 ‘그로기’라고 한다. 프로 복서가 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그로기 상태에서 잘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얻어터지는 스파링을 하면서 그로기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나름 터득했다. 상대가 몰아칠 때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일단 물러서면 안전해질 것 같지만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 물러서면서 상대가 더 때리기 좋은 거리를 고스란히 내주게 되고, 물러서면 상대의 기세를 더 올려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로기에 빠졌다면, 긴장되고 두렵더라도 가드를 바짝 올리고 상대 공격 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상대가 계속 때릴 수 있는 거리를 없애고, 기세가 더 오르는 걸 막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의 공격은 잦아들고, 혼자 가드 위를 두들기느라 지쳐서 숨을 헐떡거리는 상대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때가 되면, 이제 내가 공격할 차례가 온 것이다. 위기 뒤에는 반드시 기회가 오게 마련이니까. 그로기라는 위기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돌진하는 것으로 벗어날 수 있다.



삶이 우리를 몰아칠 때


우리는 삶의 위기의 순간에 뒤로 물러서려는 경향이 있다. 일단 물러서면 안전해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뒤로 물러서면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것 같지만 이내 상대가 더 거세게 공격하듯이 삶도 마찬가지다. 위기의 순간에 물러서면 삶은 더욱 우리를 거세게 몰아친다. 


 술만 마시면 폭언과 손찌검을 하는 남편과 살고 있는 아내를 알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남편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무단히 노력한단다. 또 남편이 화를 낼 것 같으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빈단다.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일 게다. 비단 부부 관계만 그럴까? 예전 직장 동료 중 ‘욕받이’라는 별명 가진 이가 있었다. 팀장이 화가 나는 일만 있으면 그를 불러 온갖 욕을 하며 스트레스 해소를 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 동료는 왜 ‘욕받이’가 된 걸까? 그녀와 같은 이유일 게다. 두려운 직장 상사의 인격적 모독과 욕설 앞에 그저 물러서기만 했기 때문이다.

        

 ‘욕받이’와 그녀는 긴 시간 위기의 순간에서 물러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왔던 대로 살면 상황이 호전될까? 아닐 게다. 그녀의 남편은 결코 버릇을 고치지 못할 게다. 아니 날이 갈수록 남편의 폭언과 손찌검은 더욱 심해질지도 모르겠다. ‘욕받이’ 역시 마찬가지 일게다. 팀장은 결코 버릇을 고치지 않을 게다. 팀장은 자신의 상사로부터 받았던 스트레스를 그 동료를 통해 더 심하게 해소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위기의 순간에 물러서면 안전할 것 같지만, 위기의 순간에 물러서기 시작하면 결국 더 크고 심각한 위기를 자초하는 것일 뿐이다.


삶의 그로기에서 벗어나는 법

      

복싱을 하면서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건 반복되는 위기 순간에는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생에 한두 번 정도 겪게 되는 위기, 또 하나는 반복적으로 겪게 되는 위기. 전자의 위기는 강도를 당하거나 천재비면 같은 자연 재해를 입는 것이다. 이럴 때는 가급적 위기로부터 물러서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인생에서 반복되는 위기에는 이런 식으로 대처하는 건 곤란하다. 왜냐? 그런 위기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위기에는 두 눈을 질끈 감더라도 그 위기 안쪽으로 파고드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반복되는 위기로 얼마나 자주 그로기에 빠졌던가? 남편이 술 마시고 올 때마다 겪었던 위기, 팀장이 상사에게 깨지고 올 때마다 겪었던 위기. 그뿐인가? 돈이 없을 때 느껴지는 위기, 집단에서 소외당할 때 느껴지는 위기, 사람들에게 근거 없는 비난을 받을 때 느껴지는 위기. 그 반복되는 위기는 여지없이 우리를 그로기로 내몬다. 그 그로기를 세상 사람들은 ‘자괴감’이라고 부른다. 반복된 위기에 담대하게 맞서지 못하고 물러서기만 했을 때 자괴감이라는 그로기에 빠진다.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담대함


그 자괴감 앞에 계속 물러만 나서는 안 된다. 가드를 바짝 붙이고 쏟아지는 공격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두렵고 불안하겠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딱 한 번의 담대함이면 된다.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와 폭언과 손찌검을 하려고 하면, “네가 인간이냐?”라고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려고 부하직원의 인격모독을 일삼는 상사에게 “지금 뭐하시는 거죠?”라고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두렵고 긴장되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상대 안쪽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


 다른 반복된 위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위기든 반복된다면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렇게 단 한 번의 담대함을 발휘할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게 된다. 쏟아지는 주먹 속으로 파고든 복서들은 안다. 의외로 상대의 주먹이 맞을 만 하다는 것, 그리고 정신없이 공격하느라 상대가 점점 지쳐가고 있다는 걸. 그때가 되면 직감하게 된다. ‘이제 내가 공격할 차례구나!’ 삶의 그로기에 빠졌다면, 뒤로 물러서지 말자. 두렵다면, 가드를 바짝 붙이고 눈을 질끈 감고 상대 앞으로 돌진하자. 그렇게 상대에게 맞설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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