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좋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좋은 글은 자신의 어둠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글인 까닭이다." 황진규
0.
"보편적인 것이 단독적인 것이며, 단독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 언젠가 어느 철학자에게 들었던 말이다. 진짜 자신의 뼈저린 경험을 녹여 만든 노래는 테크닉적으로 훌륭한 노래실력이 아니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지극히 단독적인 것은 보편적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지극히 단독적인 자기 자신의 삶을 걸어가며 힘들었던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삶도 이해할 수 있다. 어줍잖게 남들 얘기만 하면서 다 아는 듯이 떠드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위대한 화가들이 자화상에서부터 자신의 작품을 시작하듯, 좋은 글은 지극히 단독적(개인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듯, 나는 지극히 단독적(개인적)인 '나'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1.
나의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누구나 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 또한 누구나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자기합리화에 능한 인간은 받은 폭력(상처)만 보며 피해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모습 마저도 꺼내기 쉽지 않다. 자신의 작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기에) 하지만 누구나 폭력을 행한 적이 있다. 나 또한. 폭력을 당한 나의 모습도 폭력을 행사한 나의 모습도 모두 있다. 이 사실을 단숨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먼저 가족의 폭력이 떠올랐다. 가족의 폭력은 기묘하다. 친절하고 온화한 미소로 강요하는 폭력을 당하면 이유도 모른 체 알 수 없는 증오심이 생긴다. 부모에게 당하는 폭력이 종종 이러한 양상을 띈다. 또한 가족은, 부모는 사랑해야한다고 공경해야한다고 주입을 받은 우리는 부모를, 가족을 있는 그대로 100% 증오하기 어렵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가족의 폭력은 원색적이었다.
아버지는 줄곧 엄마에게 폭력을 행했다. 실제로 신체적인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말로 엄마를 샅샅이 파헤치고 찌르며 오랫동안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큰 폭력을 행사했다. 엄마는 도망갈 곳 없는 집에서 그 폭력을 온 몸으로 받아내었다. 엄마는 힘들었고, 때론 싸웠고, 때론 그저 포기하고 버텼고, 그렇게 버티다 그 쌓인 폭력의 응어리를 해소할 곳이 필요했다. 모든 폭력이 그렇듯 응어리진 폭력은 약한 자들을 향한다.
중학교 즈음 화살이 나를 향했다. 가끔 폭발한 엄마는 나를 보이는 곳은 어디든 때렸다. 갑자기 무방비 상태로 맞게될 때면, 나는 신발장 옆으로 웅크려 등짝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 나는 맞기만 했을까. 엄마한테 맞던 나는, 쌓였던 폭력의 응어리를 언니를 향해 풀었다. 엄마처럼. 밥 먹다가도 뭐에 홀린 듯 사악하게 악마 같이 못된 말들을 쏘아붙였던 기억이 희미하게 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 나 왜그리 심하게 언니를 괴롭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가 많이 힘들어 했다. 그 즈음 언니가 잘때 이를 갈았었는데, 한창 뒤에 언니가 말해주길 정신과에 상담을 다니고 있었고 처방받은 약의 부작용이 이를 가는 것이었단다.
여느 폭력이 그렇듯 나의 폭력 역시 가족을 넘어 왔다. 학교에서의 왕따를 당한 기억은 상처이고 마음에 오래 남는다. 신체적인 폭력을 당한 적은 없지만 크고 작은 왕따를 당했던 기억이 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갑자기 놀던 친구들과 놀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버려진 적도 있고, 은근하게 웃으면서 조롱하는 여자애들 특유의 폭력을 당한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왜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무서워하던 친구 H가 있었다. H는 나를 뭔가 힘들게 했었다.
그런데 나는 H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조용히 소외되었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다른 친구 S가 H에게 나 대신 화를 내줬었다. S에게 고마워했어야 했으나 그때 난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S에게 엄청 화를 냈었다. H도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하면서. '너가 뭔데 걔한테 그런 얘기를 하냐'고 화를 내며 고마워야할 S와의 관계를 오히려 끊었다. S는 나를 생각하고 용기내어 한 행동인데 큰 상처를 받았겠지. 또래 친구들과 좀 다른 생각갖고 있던 S는 중학교 때 대안학교로 갔었다.
2.
나는 내가 폭력을 당하고만 산 줄 알았다. 착한 사람으로 보이려했고, 신체적인 힘도 약하고, 회사에서도 거의 가장 낮은 직급이고 막내 급이니 그럴법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도 폭력을 가한 적도 있고, 지금도 쉽게 가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받았던 폭력처럼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진지하게 철학을 공부하고 직장에서도 나름 열심히 일하면서 나에게는 어느 정도 힘이 생겼다. 내가 속한 철학공동체에서도, 회사에서도 나의 힘이 느껴진다.
상처받은 기억은 누구나 있고, 또 현재도 크고 작은 폭력을 받고 있을 테다. 그런 폭력의 상처는 쌓이면 어디로든 튀어나온다. 성찰하고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 폭력은 반드시 나보다 약한 사람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할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고 폭력을 가한 사람한테 따져 물어야 한다. "왜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냐?" "왜 나를 부당하게 힘들게 하냐?" 그러지 않으면 내가 받은 폭력과 상처를 대물림 하게된다.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얼마전 공부하고 있는 철학 공동체에서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선 넘지 말고 당신이나 잘하라'며 함께 공부하는 한 사람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다.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의 잘못 때문이었을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쌓인 분노가 임계치에 다다랐을 즈음, 그 사람의 글이 보였던 거다. 나는 철학공동체에서 힘이 있다. 소위 말하는 '고인물'이다. 그 공동체에서 더 오래 공부했고, 그래서 철학적 지식도 더 알고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넓고 깊다.
애둘러 말할 필요 없다. 충분히 내 삶을 성찰하지 못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나의 응어리진 분노를 애꿎은 이에게 쏟아냈다. 나나 잘할 일이었다. 터트려야할 때 터트리지 않고 쌓은 화를 안고 있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보지 않으면서, 제 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나는 잘하고 있지 않으면서 괜히 다른 사람한테 화를 냈다. 나는 이제 그러고 싶지 않다.
뭘 모르던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언제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내가 가하는 폭력이 정당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정신 차리고 잘 살펴야 한다. 철학을 하려면, 삶을 잘 살아내려면, 잘 먹고 운동하고 체력을 길러야 한다. 그 힘으로 혼란스러운 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내 중심을 잡아야 한다. 지금 내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내가 하고 있는 행동들이 뭔지 잘 살펴야 한다. 잠시 휩쓸리더라도 다시 중심을 잡고 다시 이어가야 한다. 멈추어서는 중심을 잡기 어렵다. 움직여야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중심은 밑에 뿌리에 있지 않다. 위에 머리에 있지 않다. 가운데에 있다. 그렇게 기쁜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
황인화
- 의류업계 종사자인데, 철학공부 중
- 철학 배워서 직장 완벽적응(직장을 왕따시키고 있음)
- 키가 170인데, 철이 없음
- '진격의 거인'화 진행중 (갑자기 힘이 생겨서 주체를 못하고 있음)
- 특기 사항 : 밥은 천천히 먹지만 3 시간 연속 식사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