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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라는 피해의식의 얼굴

학벌에 관한 피해의식


학벌(학업을 통해 얻게 된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현철’은 공부를 못했다. 당연히 대학도 이름 없는 지방대를 나왔다. ‘현철’의 형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서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알만한 명문대를 나왔다. “우리 현철이가 형만큼만 공부를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의 입버릇이었다. 부모는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늘 ‘현철’을 형과 비교했다. “현빈이는 이번에도 1등이지. 어? 현철이? 글쎄. 잘 모르겠네.” ‘현철’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부모의 통화를 들으며 알았다. 형은 부모의 자랑거리이지만, 자신은 부모의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현철’은 학벌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해 과도한 자기방어의 마음이 생겼다. “내 까짓게 뭘 잘할 수 있겠어. 옆 사람들한테 피해만 안줘도 다행이지.” 의아하다. 이런 자기비하적인 마음이 왜 자기방어란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다. 이 마음은 언제 고통이 되는가? 사랑받지 못했을 때인가? 아니다. 앞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망(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사랑받지 못하는 건 견딜만하다. 그 희망(가능성)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는 채로 기다려야 할 때다. 언제 사랑받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로 사랑을 기다려야 할 때 가장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마치 지독한 희망고문의 고통처럼 말이다.       


 이 고통에서 자기를 방어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열등감이다. 열등감이 무엇인가?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능력 혹은 매력이 없어서) 항상 뒤떨어진 존재라고 여기는 만성적인 의식이다. 이는 명백히 자기방어의 마음이다. 자신은 타인에 비하여 항상 뒤떨어진 존재라고 확정해버리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존재라고 확정해버리면 사랑(인정‧관심‧칭찬)받지 못해 고통스러운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애초에 사랑받을 가능성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확정해버리면 사랑받지 못해 고통스러울 일도 없으니까 말이다.


 공부는 못했지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던 ‘현철’은 어느 잡지사에서 포토그래퍼로 일하고 있다. ‘현철’은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현철’은 유식해보이거나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 앞에서는 시선을 피하거나 말을 더듬곤 했다. 자기비하에 빠지며 주눅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이해되지 않을 일이 ‘현철’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유식하고 학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면 ‘현철’은 공부를 못해서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 홀로 방안에서 사진기만 만지작거렸던 주눅 든 아이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열등감의 두 가지 양상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열등감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소극적인 열등감과 적극적인 열등감이다. 소극적인 열등감은 위축감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열등감에는 적극적인 열등감도 있다. 이는 시기와 질투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주 통제할 수 없는 시기와 질투에 휩싸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기와 질투가 피해의식이 갖고 있는 별도의 얼굴은 아니다. 이는 열등감이라는 얼굴에서 파생된 표정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시기와 질투는 열등감의 표현이다.       


 열등감은 결국 사랑받지 못해서 생긴 마음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사랑받을 가능성을 애초에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쪽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위축감),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자신만이 누군가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시기‧질투). 즉, 소극적인 열등감(위축감)과 적극적인 열등감(시기‧질투)은 동전의 양면처럼 반드시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위축된 이는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이는 위축감에 짓눌린  상태다. ‘현철’은 유식해보이거나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 앞에서 위축감만을 느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현철’의 마음 한 구석에는 그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늘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열등감이라는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우리는 때로 열등감으로 방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어찌 이해하지 못할까? ‘현철’에게 자신이 타인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믿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나는 형과 동등해!”라고 믿었다면, 현철은 어떻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고통 받았던 시간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남겨진 열등감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형과 유사한 존재들만 보면 그 상처는 다시 벌어져 진물이 흐른다.      


 하지만 ‘현철’은 알고 있을까? 그 열등감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진마저도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걸. 당연하지 않은가. 열등감에 휩싸인 이들이 어찌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할 수 있을까. ‘현철’은 알고 있을까?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연인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는 걸.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가 어찌 한 사람에게 크고 깊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자신은 열등한 존재인데 말이다. 또 열등감에 휩싸인 이가 어떻게 한 사람의 크고 깊은 사랑을 어찌 받을 수 있을까. 자신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을 텐데 말이다. 피해의식이 열등감이라는 얼굴로 우리를 찾아올 때 불행의 전주곡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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