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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이라는 피해의식의 얼굴

외모에 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유민’은 뚱뚱했다. 유년 시절, 뚱뚱하다는 이유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집에서는 하루에 수십 번씩 “살 좀 빼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친구들은 뚱뚱하다고 놀리며 왕따를 시켰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민’은 긴 시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가 ‘유민’에게 선물과 편지를 주는 것 아닌가. 설렘과 환희는 찰나였다. “이거 예은이한테 전해줄 수 있어?” 그때 ‘유민’은 알았다. 남자들에게 자신은 ‘여성’이 아니라 ‘인간’이란 걸. 직장에서도 주변의 모든 관심은 날씬하고 근사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쏟아졌다. 그때 ‘유민’은 알았다. ‘왕따’보다 ‘무관심’이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걸.     


 ‘유민’은 외모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해 과도한 자기방어의 마음이 생겼다. “이제 사람들 안 만나고 혼자 있고 싶다.” ‘유민’은 오직 뚱뚱하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냉대, 그리고 무관심에 온 몸이 베였다. 세상에 나오는 것은 스트레스가 되었고, 그 스트레스는 다시 먹는 것으로 풀어야 했다. 뚱뚱함의 악순환에 빠진 셈이다. 그렇게 ‘유민’은 점점 집안에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유민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유쾌하게 살아가기보다 홀로 방안에서 침잠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유민’은 왜 홀로 방안에서 남겨 졌을까?      


 바로 무기력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타자(나와 다른 삶의 규칙을 갖고 있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기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타자가 득실거리는 세상을 피하려는 이유다. 피해의식은 무기력을 낳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왜 무기력을 낳는가? 이는 단순히 ‘유민’이 외모 때문에 비난받고 무시당해서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차원의 의미가 아니다. 물론 누군가를 만나서 인정, 칭찬, 관심이 아니라 비난, 무시, 냉대를 받으면 삶의 의욕이 생길 리가 없다. 하지만 모든 이가 세상 사람들의 비난, 무시, 냉대를 받았다고 방안에 홀로 남겨질 만큼 무기력해지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타인의 비난, 무시, 냉대에 잠시 기분이 쳐지더라도 금방 다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한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빠진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무기력은 자기방어이기 때문이다. ‘유민’은 어린 시절부터 외모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그런 ‘유민’에게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다’는 말과 동의어다. 이런 상황에서 ‘유민’은 어떻게 자기를 보호해야 할까? 삶의 의욕을 없애서 무기력해져야 한다. 삶의 의욕이 생기면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만나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마음이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유민’은 의식적으로는 “삶의 의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무기력해지고 싶다”고 바란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무기력이라는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우리는 때로 무기력으로 방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어찌 이해하지 못할까? 유민에게 삶의 의욕은 잠재적 상처다. 조금이라도 삶의 의욕이 생기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부모, 선생, 친구, 동료에게 지독히도 상처받았던 기억이 떠오르기에 다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유민’에게 삶의 의욕은 잠재적 상처, 즉 명백히 다가올 예정된 상처일 뿐이다. 그러니 삶의 의욕을 없애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유민’은 알고 있을까? 방안에 혼자 남겨진 삶은 필연적(100%) 불행이지만, 타자를 만나러 가는 삶은 가능적(50%) 행복이라는 사실을. 방안에 홀로 있으면 안전할 것 같지만 이는 결국 100% 불행해지는 길이다. 인간은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매순간 50%의 행복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세상 어딘가에는 ‘유민’의 상처를 이해하고 사랑해줄 사람이 분명 있다. (만났던 타자를 전체로 통계를 잡으면 50% 훨씬 못 미치겠지만) 타자를 만나는 매순간, 그 사람을 만날 확률은 50%나 된다. 하지만 무기력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할 때 그 행복할 50% 가능성은 사라져버리고 100% 불행의 길로 접어든다. 피해의식이 무기력이라는 얼굴로 찾아올 때 불행의 전주곡인 이미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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