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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이라는 피해의식의 얼굴

피해의식이 드러내는 얼굴의 층위


 피해의식의 얼굴(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의 층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4 가지 얼굴(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과 나머지 2가지 얼굴(억울함‧우울함)은 다른 층위의 얼굴이다. 피해의식의 정의부터 다시 살펴보자. 피해의식은 상처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이라는 얼굴은 그 자기방어의 ‘도구’라면, ‘억울함‧우울함’이라는 얼굴은 그 자기방어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어떤 우연적 대상(가난‧성차별‧타자‧학벌…)을 통해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을 느끼는 것은 과거 상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마음이다. 반면, ‘억울함‧우울함’은 그런 지속적인 자기방어 때문에 결과적으로 등장한 마음이다.      


 피해의식은 어떻게 억울함으로 나타날까? 사랑에 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승주’는 사랑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 늘 바빴던 부모님은 승주를 집에 혼자 남겨두었다. 빈 집에서 혼자 남겨진 승주는 너무 무서워서 바지에 오줌을 쌌다. 시간이 지나 혼자 남겨지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혼자 베란다 서서 부모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커서도 사랑받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아이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법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도 미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받지 못한 ‘승주’는 종종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곤 했다. 두려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버림받을까 두려웠다. 또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 홀로 집에 있는 아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분노. 누군가에게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정체모를 분노가 일었다. 자신은 여전히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아이인체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열등감. 누군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에 휩싸였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하는 법조차 알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무기력. 그렇게 ‘승주’는 누군가를 만날 삶의 의욕을 놓아버렸다. 세상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신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억울함이라는 피해의식


 ‘승주’의 피해의식은 이 4가지 얼굴로 끝이 날까? 아니다.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이라는 부정적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가장 선명한 얼굴이 자리 잡는다. 바로 억울함이다. ‘승주’는 모든 것이 억울하다. 자신만 억울하게 삶이 엉망이 된 것 같다. 왜 안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기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승주는 기쁜 삶은커녕 매순간 두렵고, 분노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진다.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지독히도 싫으면서도 결코 쉬이 벗어날 수도 없다. 그러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단 ‘승주’만 그럴까? 모든 종류의 피해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감정이 바로 억울함이다. 돈, 젠더, 외모, 학벌, 사랑 등등 모든 종류의 피해의식이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에 빠지면 모든 것이 억울하다. 돈 많은 사람을 봐도 억울하고, 남자(혹은 여자)를 봐도 억울하고, 멋있고 예쁜 사람을 봐도 억울하고, 학벌이 좋은 사람을 봐도 억울하고, 삶의 의욕이 넘치는 이들을 봐도 억울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봐도 억울하고, 사랑받는 이들을 봐도 억울하다. 피해의식이 휩싸인 이들은 매순간 누구를 만나도 억울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억울함이라는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이는 심각한 불행을 초래한다. 억울함만큼 우리네 삶을 좀 먹는 감정도 없다. 억울함은 시기와 질투를 야기하고 이는 결국 인간관계의 크고 작은 파열음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억울함은 퇴행적 감정이다. 억울함은 지금 자신의 삶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불행했던 과거로 퇴행하게 만든다. 억울함은 지금 자신이 처한 많은 문제들을 적절하게 해결해나가려 하기보다 ‘나는 억울하다’는 이유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빠진 이들이 자신의 삶을 현재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기보다 퇴행적이고 수동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유다. 피해의식이 억울함이라는 얼굴로 찾아올 때 불행의 전주곡이 아니라 불행 그 자체가 이미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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