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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와 피해의식, '사실'과 '기억' 사이

‘피해자-피해의식’의 4가지 관계성


피해의식은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하는 주제다. 피해의식 담론에서 '피해자'와 '피해의식'의 관계를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다. '피해자'와 '피해의식'이라는 개념이 뒤엉켜 발생한 오해는 많다. 당연한 일이다. 피해자와 피해의식은 매우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마음, 즉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며, 이 둘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일단,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개연성이 있다. 쉽게 말해 피해자가 아니면(피해를 받지 않으면) 피해의식이 생길 개연성이 낮고, 피해자이면(피해를 받으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둘이 직접적(결과론적)인 인과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피해자와 피해의식의 관계성을 살펴보는 것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피해자와 피해의식의 관계는 4가지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피해자이기에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경우다. 이는 피해자 의식이 피해의식이 된 경우다. 둘째는 피해자이지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는 경우다. 이는 피해자 의식이 피해의식으로 옮겨가지 않은 경우다. 셋째는 피해자가 아니지만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경우다. 이는 피해자 의식 없이도 피해의식이 발생한 경우다. 넷째는 피해자가 아니기에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경우다. 이는 피해자 의식이 없기에 피해의식도 발생하지 않은 경우다.      


 이 4가지 경우는 어린 시절 강도를 당한 경험을 예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는 강도(피해)의 경험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밤에는 집 밖을 나가지 않게 된 이들이다. 두 번째 경우는 강도의 경험이 있지만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밤에 나갈 수 있는 이들이다. 세 번째 경우는 강도를 당한 경험이 없지만 (강도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밤에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이들이다. 네 번째 경우는 강도를 당한 경험이 없어서 밤길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나설 수 있는 이들이다. 이처럼, ‘피해자-피해의식’은 4가지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처럼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이 마치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음료가 나오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피해자 의식은 ‘사실’이고, 피해의식은 ‘기억’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의 정의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피해의식은 무엇인가? 피해 받은(혹은 받았다고 믿는)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그렇다면 피해자 의식은 무엇일까?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의해 발생하는 마음 상태(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 등등)다. 간단히 말해, 피해의식은 ‘기억’의 문제이고, 피해자 의식은 ‘사실’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피해자 의식-피해의식’은 개연성은 있지만,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이유를 알 수 있다. ‘사실-기억’은 개연성이 있지만,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강도)이 명백하게 일어나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때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곧 ‘기억’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기억’은 마치 촬영된 CCTV화면을 보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에 대한 ‘기억’인 것은 아니다.      


 ‘사실’과 ‘기억’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사실’이 ‘기억’되기도 하지만, ‘사실’이 ‘기억’되지 않기도 한다. 심지어 ‘사실’이 아닌 일이 ‘기억’되기도 한다. ‘사실’은 언제나 조작되고 왜곡되고 편집되어 ‘기억’된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나 가족들과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너무 달라서 놀랐던 기억은 누구나 한번 즈음은 있다. 이는 ‘사실’이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조작되고 편집된 채로 ‘기억’되는지를 방증한다.   

  

 ‘기억’은 언제나 ‘사실’을 조작, 왜곡, 편집한 ‘기억’이다. 그래서 사실과 기억은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 피해자 의식(사실)과 피해의식(기억) 역시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다. 피해자 의식(사실)이 있으면 피해의식(기억)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 의식(사실)이 있더라도 피해의식(기억)은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피해자 의식(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기억)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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