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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과잉해석과 과소해석

피해의식은 균형의 문제다.


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 밀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피해의식은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피해의식은 피해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피해의식이 없으려면 ‘피해’가 없거나 ‘기억’이 없거나 ‘과도한 자기방어’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불가능하다.      


 피해(상처)를 생각해보자.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피해)를 한 번도 받지 않으면 사람은 없다. “삶은 고해”라는 싯타르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임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어떤가? 누구에게나 기억이 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예컨대 기억상실증이나 치매)가 아니라면 기억이 없는 이는 없다. 피해가 없는 이도, 기억이 없는 이도 없다. 그러니 적어도 이 두 경우에 관해서는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이제 과도한 자기방어를 생각해보자. 지독한 가난(피해)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자기방어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피해의식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있음과 없음으로 명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과도한’의 반대 개념은 ‘적절한’이다. 지독한 가난을 기억함에도 적절하게 베풀며 살줄 아는 이는 분명 피해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 순간의 문제일 뿐이다. 피해의식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옅어졌다고 말해야 적확하다.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지만 적절하게 베풀며 살던 이가 어느 순간 다시 돈 때문에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자기를 보호하는 그 순간 피해의식이 잠시 옅어진 것이고, 그 순간이 길어지면 피해의식이 옅어지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일 뿐, 피해의식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즉 피해의식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같은 균형의 문제이지 ‘있음’과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피해의식을 있음과 없음의 문제로 접근할 때 피해의식이란 문제를 잘 다룰 수 없다. 이쪽(있음)과 저쪽(없음)에 쏠리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외줄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피해의식의 과잉해석

  

피해의식은 균형의 문제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을 균형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피해의식을 과잉해석하지도 않고 과소해석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피해의식의 과잉해석과 과소해석은 피해자-피해의식 사이의 오해로부터 발생한다. ‘피해자-피해의식’이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다는 오해 말이다.       


 피해의식의 과잉해석이 무엇인가?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피해의식으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피해의식에 빠져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이는 강도를 당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밤길을 다닐 수 있게 된 이가 가급적이면 밤길을 나서지 않으려는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다. 이런 피해의식의 과잉해석은 자기 파괴적이다. 충분히 노력해서 삶의 변화를 이룬 이가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기보다 오히려 비난하고 다그치는 것보다 자기 파괴적인 일도 없다.    

  

 이런 자기 파괴적인 과잉해석은 왜 발생했을까? ‘피해자-피해의식’을 직접적 인과관계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즉 피해를 받으면 반드시 피해의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만약 피해자이더라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런 자기 파괴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은 피해를 받은 사실의 기억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그 상처를 잘 치유해왔다고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질 수 있다. 즉, 피해자와 피해의식은 개연성이 있을 뿐 직접적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 피해의식의 과잉해석은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피해의식의 과소해석     


그렇다면 피해의식의 과소해석은 무엇인가? ‘피해자가 아니면 피해의식은 없다’고 단정하는 마음이다. (“나는 강도를 당한 경험이 없으니 어떤 피해의식도 없어”) 혹은 ‘피해자가 피해의식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나는 강도를 당한 경험이 있으니 밤에 나가지 않는 건 당연한 거야”) 이런 피해의식의 과소해석은 자기 기만적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자신의 어둠을 애써 외면하는 마음은 자기 기만적이다. 또 자신과 타인의 삶 모두를 슬픔으로 빠뜨리는 자신의 어둠을 극복하려 하기보다 손쉽게 정당화하려는 마음은 또 얼마나 자기 기만적인가.


 이런 자기 기만적인 과소해석은 왜 발생했을까? 이 역시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이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다는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피해를 받지 않아도 피해의식이 발생할 수 있다. 또 피해를 받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기억은 ‘사실의 기억’보다 ‘상상의 기억’에 더 많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를 받은 ‘사실’이 없더라도, 피해를 받은 것 같다는 ‘상상’이 기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또 피해를 받은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의 기억’을 왜곡‧편집하여 ‘상상의 기억’으로 증폭시키지만 않는다면 피해를 받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다.


 사실과 기억, 혹은 피해자와 피해의식 사이의 삶의 진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피해의식을 거리 두어 볼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오직 그 공간에서만 피해의식의 과잉해석에서도, 과소해석에서도 벗어나 균형 잡힌 시각으로 피해의식을 성찰해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파괴적인 혹은 자기 기만적인 피해의식의 내적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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