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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기쁜 슬픔'이다.

피해의식은 ‘기쁜 슬픔’, 피해자 의식은 ‘슬픈 기쁨’이다.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 중요한가? 피해의식은 슬픔을 주고, 피해자 의식은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의아하다. 피해의식이 슬픔을 준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피해의식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을 야기해서 우리네 삶을 슬픔에 빠뜨리니까 말이다. 그런데 피해자 의식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가해자로부터 피해를 받으면 우리는 어떤 감정에 휩싸이게 될까? 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 같은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 역시 우리네 삶을 슬픔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이는 삶의 진실을 제대로 조망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오해다.       


 ‘수민’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기억’을 갖고 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모든 문제를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 그 때문에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에 휩싸이곤 한다. 수민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어린 시절, 수민 역시 부모에게 크고 작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지냈다. 하지만 수민은 그 ‘사실’을 조작, 왜곡, 편집해서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기억’만을 갖고 있다. ‘수민’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피해의식은 피해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이니까 말이다.         


 ‘민기’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자란 ‘사실’이 있다. ‘민기’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길 때 마다 모든 문제가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민기’는 긴 시간 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 같은 부정적 시달리며 살았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의 따뜻함과 친절함에 당황했고, 부모가 없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고, 자신을 버리고 간 부모에게 복수심이 들었고, 자신이 태어난 것을 후회했다. ‘민기’의 ‘기억’은 ‘사실’에 기초해 있다. ‘민기’의 모든 ‘기억’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민기’의 가장 큰 불행은 명백한 ‘사실’에 기초해 있다. ‘민기’는 피해자 의식이 있다. 피해자 의식은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의해 발생하는 마음 상태니까 말이다.      



피해의식은 기쁜 슬픔이다.


 언뜻 보면, ‘수민’과 ‘민기’는 모두 슬픔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성급하게 답하기 전에 기쁨과 슬픔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기쁨은 삶의 활력을 높이는 감정이고, 슬픔은 삶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수민’과 ‘민기’는 분명 슬픔에 빠져 있다. 하지만 둘의 슬픔은 전혀 다른 층위의 슬픔이다. 더 정확히 말해, 정반대의 슬픔이다. ‘수민’의 슬픔은 피해의식으로부터 온 것이고. ‘민기’의 슬픔은 피해자 의식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슬픔은 어떻게 다를까?      


 피해의식으로부터 온 슬픔은 ‘기쁜 슬픔’이다. ‘기쁜 슬픔’은 무엇일까? 슬픔 중에는 기쁨을 따르다 종국에는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슬픔이 있다. 대표적으로 음주욕과 탐식이 그렇다.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쁘다. 하지만 그 기쁨을 계속 추구하다보면 어떻게 될까? 다음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슬픔)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과식으로 인한 소화불량‧비만(슬픔)을 피할 수 없다. 이는 피해의식의 작동원리와 같다.      


 ‘수민’은 왜 슬픔에 휩싸였을까? 피해의식 때문이다. ‘수민’은 연애나 직장생활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을 때, 항상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게 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야!” 피해의식은 평면적이고 단편적 시선이다. 이는 기쁨이다. 이것이 왜 기쁨인가? 자신에게 닥친 모든 문제를 평면적이고 단편적으로 바라보면, 그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외부의 특정한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얼마나 기쁜가? 이것이 왜 기쁨인지는 거꾸로 생각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입체적‧종합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슬픔이다. 어떤 문제를 입체적‧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이 그 문제에 개입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반드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얼마나 불편하고 불쾌한 일인가. 반면 피해의식은 얼마나 편안하고 안락한 기쁨인가. 자신에게 닥친 삶의 문제를 평면적‧단편적 시선으로 바라보면 기쁨이 있다.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도, 힘들게 개입할 필요도 없게 되니까 말이다.


 자신에게 어떤 책임도 없고,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기쁨이다. 하지만 이 기쁨은 계속 기쁨인 채로 유지될까? 아니다. 이 기쁨은 술 마시는 것이 즐겁다고 계속 술을 마시는 기쁨과 같다. 이 기쁨은 곧 더 큰 슬픔으로 전락할 ‘기쁜 슬픔’일 뿐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의 모든 문제를 부모 탓으로 돌린다고 해도, 그 문제 중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또 그 때문에 수민의 삶은 앞으로 더 심각하게 꼬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기쁜 슬픔’인 이유다.



피해자 의식은 슬픈 기쁨이다.

 이제 ‘민기’의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민기’는 왜 슬픈가? 피해자 의식 때문이다. 피해 받았던 사실 때문에 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 같은 부정적 감정에 종종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감정들은 기쁨이 된다. 의아하다. 그 부정적인 감정(슬픔)들이 어떻게 우리네 삶의 활력을 높이는 기쁨이 된단 말인가? 피해자 의식의 슬픔은 ‘슬픈 기쁨’이기 때문이다. ‘슬픈 기쁨’은 무엇인가? 슬픔 중에는 그 슬픔을 견디다 끝내는 기쁨으로 전복되는 슬픔이 있다. 그것이 ‘슬픈 기쁨’이라는 감정이다.      


 대표적으로 수치심이 그렇다. 카페 옆 테이불 밑에 5만 원 짜리가 한 장 떨어져 있다. 누가 봐도, 그 테이블 사람이 흘린 것이다. 마침 그 순간 옆 테이블 사람이 화장실을 가는 것 아닌가. 아무도 보지 않고 있어서 슬쩍 그 5만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그 일에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이건 남의 돈을 훔친 거야.” 그 고통스러운 수치심(슬픔)을 잊지 않고 계속 마음에 담아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느 날, 길거리에서 백만 원이 떨어져 있어도 내 주머니에 넣지 않고 주인을 찾아주려 할 것이다. 그때 자신이 당당한 사람이라는 자부심(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는 피해자 의식의 작동원리와 같다.

      

 ‘민기’는 왜 슬픔에 빠졌을까? 피해자 의식 때문이다. ‘민기’는 삶의 이런 저런 문제 앞에서 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 같은 슬픔의 감정에 휩싸였다. 왜 그랬을까?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자랐던 ‘사실’ 때문이다. “이게 다 부모에게 버림받아서 일어난 일이야!” 피해자 의식은 고정된 시선이다. 이는 살점이 떨어져 나간 고통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상처만 바라보게 되는 마음과 같다. 이는 이중의 슬픔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통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슬픔이고, 그 슬픔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 또한 슬픔이다.

  

 이는 피해자의 마음과 같다. 피해자 의식은 이중 슬픔이다. 이제 우리는 더 큰 의아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중의 그 지독한 슬픔이 어째서 기쁨이란 말인가? ‘민기’의 슬픔(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은 계속 슬픔인 채로 남을까? 아니다. 이 슬픔은 수치심의 고통을 감내하는 슬픔과 같다. 이 슬픔은 어느 순간 기쁨으로 비상할 ‘슬픈 기쁨’이다. 물론 ‘민기’가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았다면 더 없이 좋았을 테다. 하지만 그 일은 불행히도 이미 일어났다. 운 좋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일단 불운하게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면 어떻게 할 텐가?



신체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

   

 세상 사람들은 상처와 고통이 크면 클수록 마치 그것이 없는 일인 것처럼 성급하게 은폐하고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그네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렇게 은폐된 상처는 짓무르고 곪아서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상처를 직시해야한다. 성급하게 덮어 두느라 상처에 눌러 붙은 천 조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렇게 고통을 감당하며 상처 부위를 벌려 곪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약을 발라주고 햇볕에 쬐어주고 바람도 쐬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상처를 가장 빨리 아물게 하는 방법이다.

    

 ‘민기’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처는 무엇인가?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실’이다. ‘민기’를 종종 찾아오는 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 같은 슬픔은 그 상처 때문에 발생한 고통인 셈이다. ‘민기’는 슬픔을 견뎌냈다. 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의 슬픔을 아프게 직시했다. 자신에게 당황하고, 증오하고, 후회하고, 수치스럽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는 얼마나 큰 슬픔(고통)인가. ‘민기’의 그 슬픔은 기쁨으로 가는 슬픔이다. 슬픈 기쁨. 자신의 슬픔을 있는 그래도 직면한 피해자들은 반드시 기쁨의 삶으로 나아간다.   

   

 신체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는 같다. 신체적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 고통이 필요하다. 그 고통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고통은 조금씩 잦아들게 된다. 그때 비로소 바로 자신 옆에 있었던 아름다운 경치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마음의 상처 역시 그렇다. 정서적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그 슬픔을 견뎌야 한다. 그 슬픔이 필요하다. 그 슬픔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그 슬픔은 조금씩 잦아들게 된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기쁨의 순간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이것이 불운했던 피해자가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면 당황‧증오·후회‧수치심‧복수심 같은 부정적 감정(고통)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들을 외면하고 은폐하면 큰 문제가 된다. 그 은폐된 부정적 감정이 바로 골 깊은 피해의식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실 때문에 발생한 부정적 감정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기쁨의 활로가 열린다. 자신의 슬픔에 직면했던 ‘민기’는 이제 그 상처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자신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에 시선을 돌려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민기’는 피해자 의식으로부터도 피해의식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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