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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피해의식'을 구분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게 될까? 다시 강도를 당한 경험을 예로 돌아가 보자. 네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강도를 당한 경험이 피해의식을 야기한 경우. 둘째, 강도를 당한 경험이 피해의식을 야기하지 않은 경우. 셋째, 강도를 당한 경험이 없지만 피해의식이 발생한 경우. 넷째, 강도를 당한 경험이 없어서 피해의식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     


 먼저 첫 번째 경우와 두 번째 경우부터 이야기해보자. 첫 번째 경우는 피해자 의식이 피해의식이 된 경우다. 이는 강도를 당해서 꼭 필요한 일정이 있어도 밤길을 나서지 못하는 경우다. 이는 분명 피해의식(과도한 자기방어)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사실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상처(피해)를 받아서 자신을 과보호하려는 마음(피해의식)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차츰 가라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피해자 의식이 없어서 피해의식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는 애초에 아무런 문제가 아니니 더 이상 논의하지 않아도 좋겠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경우와 세 번째 경우다. 두 번째 경우를 이야기해보자. 피해자 의식이 피해의식이 되지 않는 경우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이것이 왜 심각한 문제란 말인가? 피해자이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이지 않은 것은 씩씩하고 건강한 삶 아닌가? 강도를 당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일정에는 밤길을 나서는 이는 얼마나 씩씩하고 건강한가.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도(가난)를 당했지만 필요에 따라 밤길(소비)을 나설 수 있게 된 이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강도(가난)를 당하지 않은 이들보다는 가급적 밤길(소비)을 피하려 할 수밖에 없다. 다친 상처를 아무리 잘 치료한다 해도 희미한 상흔은 남겨지는 법이다. 또한 그 상처가 깊었으면 그 깊이만큼의 상흔이 남겨지는 법이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그 상흔을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바라봐줄까? 안타깝게도 그런 이들은 드물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잘 치유한 씩씩하고 건강한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왜곡된 시선을 보내곤 한다. “밤길 안 다니는 건(돈 안 쓰는 건) 네 피해의식 때문이잖아.” 그것이 겨우 상처를 치유한 이들에게 또 다시 상처를 주는 일인지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이렇게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을 구분하지 못하면, 피해자였지만 온 힘을 다해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이에게 다시 피해(상처)를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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