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피해의식이 졸렬하고 저열한 공격이 될 때

피해의식이 졸렬하고 저열한 공격이 될 때

 

'피해자 의식-피해의식'을 구분하지 못하면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수찬’은 피해자다. 우리 시대에 자본적 차별로 인한 피해는 엄존한다. 수찬은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상처 받은 피해자다. 수찬은 지금 협동조합을 만들어 일하고 있다. 수찬은 피해자이지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피해의식은 피해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수찬은 피해 받은 기억이 있지만 그 때문에 자신을 과도하게 자기를 방어하려는 마음은 없다. 자신이 받은 상처 때문에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에 휩쓸려 살지 않는다. 수찬이 협동조합에서 고되게 일하는 이유는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자본적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서다.


 ‘민정’은 피해자다. 우리 시대에 성(젠더)적 차별로 인한 피해는 엄존한다. 민정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상처 받은 피해자다. 민정은 지금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민정은 피해자이지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민정은 피해 받은 기억이 있지만 그 때문에 자신을 과도하게 자기를 방어하려는 마음은 없다. 누군가를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 자신이 받은 상처 때문에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에 휩쓸려 살지 않는다. 그녀가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하는 이유는, 긴 시간 견고하게 자리 잡은 성적 차별에 저항해 조금 더 인간다운 사회를 나아가기를 바라서다.      


 ‘수찬’과 ‘민정’은 피해자이지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다. ‘수찬’과 ‘민정’은 그네들의 선의와 상관없이 2차 피해를 당하게 될지 모른다. ‘수찬’과 ‘민정’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종 공격 받는다. 세상 사람들이 수찬과 민정을 손쉽게 공격하는 방식이 있다. “그거 네 피해의식 때문이잖아.” 조금 더 자유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려는 마음을, 개인적 열패감이나 복수심의 차원으로 폄하하고 매도하는 방식의 공격이다. “자기가 돈 벌 능력이 안 되니 협동조합이나 하는 거지” “페미니즘으로 왜 자기 분풀이를 해”


 

안목이 빈약하거나 부재할 때

 이 얼마나 졸렬하고 저열한 공격 방식인가. 이런 졸렬하고 저열한 공격은 왜 발생했을까? 근본적으로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의 관계를 구분하지 못해서다. 즉, 피해자는 반드시 피해의식이 있을 거란 잘못된 믿음 체계 때문이다. 이 잘못된 믿음이 야기하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바로 세상을 이해하는 안목의 빈약과 부재다. 안목이 빈약하거나 부족한 이들의 공통적인 삶의 태도가 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목이 빈약(부재)한 이들이 낯선(자신의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은 간편하다. 그 낯선 존재 자체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자신의 수준(해석체계)에서 그 낯선 존재를 해석해버린다. 이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안목이 빈약(부재)한 이들에게 피해자이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이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를 받으면 마음이 뒤틀어져 반드시 피해의식에 휩싸여만 한다. 그들에게 그렇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해를 받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이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만약 그렇게 보이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무언가 은밀한 꿍꿍이나 노림수는 있는 이들일 뿐이다.       


 빈약한(부재한) 안목을 가진 이들이 ‘수찬’과 ‘민정’에게 졸렬하고 저열한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다. ‘수찬’과 ‘민정’이란 낯선 존재를, 자신의 수준(세계관) 안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찬’과 ‘민정’을 향한 졸렬하고 저열한 공격이 넘쳐나는 이유는 안목이 빈약(부재)한 이들이 세상에 그만큼 넘쳐나기 때문일 테다.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그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빈약한(부재한) 안목의 결과일 뿐이다.      


 피해를 받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이지 않고 살아가는 성숙한 이들은 (드물기는 하지만) 분명 존재한다. 피해자와 피해의식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바로 세계를 이해하는 안목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의식을 피해의식으로 매도하는 졸렬하고 저열한 공격은 멈출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빈약하거나 부재한 삶의 안목을 높이는 일이다. 피해자이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이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작가의 이전글 '피해자-피해의식'을 구분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