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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상상의 기억화!

두 가지 기억. 사실의 기억과 상상의 기억

 피해자가 아니지만 피해의식이 발생한 경우를 이야기해보자. 이 역시 심각한 문제다. 왜 그런가? 이 부류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강도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강도를 만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절대로 밤에 집밖을 나가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는 한 번도 가난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가 자신이 돈 때문에 피해 받고 있다고 여기는 마음과 같다.      


 이런 경우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 역시 피해자 의식과 피해의식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피해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피해자 의식은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의해 발생하는 마음 상태다. 피해의식은 ‘기억’과 관련된 문제고, 피해자 의식은 ‘사실’에 관련된 문제다. ‘기억’과 ‘사실’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기억은 ‘사실’일까? 즉, 우리는 정말 있었던 일 그대로를 기억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기억에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사실의 기억’과 ‘상상의 기억’ 이 두 기억은 어떻게 다를까?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사랑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이때 ‘사실의 기억’은 12월 24일 홍대 카페에서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2년 동안 서로 연애를 했다는 기억이다. 이처럼 ‘사실의 기억’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기억이다. 이 ‘사실의 기억’은 그 기억과 관계된 사람이라면 누구도 달리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사실의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상상의 기억’도 갖고 있다.  

    

 그녀는 2년 동안 그 남자에게 헌신했고, 그 남자와 애틋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기억도 갖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실의 기억’을 공유한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 2년 동안의 연애를 지옥 같은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왜 이런 모순적인 일이 발생한 걸까? 그녀는 ‘사실의 기억’뿐만 아니라 ‘상상의 기억’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2년 동안 남자와 지독히도 싸웠고, 때로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사실’을  왜곡‧조작‧편집한 ‘기억’을 갖고 있다. 이것이 ‘상상의 기억’이다. ‘상상의 기억’은 ‘사실의 기억’을 왜곡‧조작‧편집한 기억이다. 이것이 ‘사실의 기억’을 공유한 이들이 저마다 상이한 기억을 갖고 있는 이유다.      



피해의식, 상상의 기억화!

 이제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피해의식을 야기한 기억은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왜곡‧조작‧편집된 ‘상상의 기억’에 의해 피해의식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강도를 당한 ‘사실’이 없지만 극단적으로 밤길을 피하는 사람의 정서 상태는 어떤 것일까? 이를 단순히 겁이 많다는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겁은 근본적으로 기억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를 당한 기억 때문에 사고를 겁내는 것이지, 사고 당한 기억 자체가 없다면 사고에 대한 겁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강도를 당한 적이 없지만 밤길을 피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는 의식적으로야 자신이 강도를 당한 적이 없다고 (사실적) 기억하겠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매체나 주변 이야기를 조합해) 자신이 이미 강도를 당했다고 (상상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이 기억화되지 않았다면, 실제로 강도를 만난 적도 없는데도 강도를 만날 것 같은 불안과 공포 때문에 (극단적으로 밤길을 피하는) 심각한 불편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삶의 불편을 초래하는 불안과 공포는 상상(환상)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의 기억화, 즉 ‘상상의 기억’의 문제다.    

  

 이런 사례는 흔하다. ‘서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가난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돈 때문에 받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애를 쓰고 어떤 상황에서든 돈을 쓰는 것에 매우 인색하다. 가난으로부터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즉, ‘서희’는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서희’는 피해자가 아님에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전형적인 사례다. ‘서희’는 왜 피해의식이 생겼을까? 바로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돈 많아도 길거리로 나앉는 건 순간이야!” 자수성가한 ‘서희’ 아버지의 입버릇이었다. 지독히 반복되었던 그 말에 ‘서희’의 기억은 왜곡‧조작‧편집되었다. 서희의 ‘사실의 기억’에 가난은 없다. 하지만 ‘서희’의 ‘상상의 기억’ 속에는 자신이 서울역에서 노숙하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피해 받은 ‘사실의 기억’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지만, 피해 받았다는 ‘상상의 기억’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 이것이 피해자 의식이 없이도 피해의식이 발생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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