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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스물 몇 살 즈음이었을까요? 많이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함께 있는 시간에는 늘 그 친구를 바라봤고, 함께 없는 시간에는 늘 그 친구를 생각했죠. 이런 저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종종 표현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녀는 이런 저의 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동아리 선배와 자주 만나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그녀가 선배와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그 날, 고통스럽게 눌러 담아두었던, 제 질투심은 폭발해버리고 말았죠. “다시는 너를 생각하지 않겠다.” 그녀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버렸죠. 이 일은 제 인생에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어요. 하지만 이 낯부끄러웠던 일은 사랑과 질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어요. 

     

 흔히들, ‘너’를 사랑하면 질투심이 생긴다고 말하죠. 이 말은 옳은 걸까요? 이 말은 삶의 진실을 정반대로 보는 거죠. 질투심은 일종의 소유욕(나의 것!)이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죠. 어떤 상품이 마음에 들 때 우리는 그것을 갖고 싶죠. 질투심은 그 상품이 한 사람이 되었을 때 발생하게 되는 감정이죠.  질투는 ‘너’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에요. ‘나’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이지. 세상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면 질투심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를 좋아하더라도 ‘나’보다 ‘너’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겠죠.

     

 저는 왜 질투심에 휩싸였을까요? 그녀를 사랑해서? 아니에요. 나를 사랑해서였죠. 저는 늘 그녀를 바라봤던 게 아니에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늘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지. 저는 늘 그녀를 생각한 게 아니었어요.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 저는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사랑한 것이지. 저는 온 통의 내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질투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내 것이 되어야 할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으니 고통스러울 수밖에요.   

   

 그녀는 왜 제가 아니라 선배를 좋아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죠. 저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늘 제 자신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녀를 좋아하는 내 마음에 취해, 정작 내가 좋아하는 이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볼 수 없었던 거죠. 그녀는 나와 있을 때 외로웠을 거예요. 아마 그 선배는 나보다 성숙했을 거예요. 그녀의 상처와 아픔을 바라봐주었겠죠. 그녀는 선배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의 상처와 아픔이 조금은 덜어졌겠죠. 그녀가 제가 아니라 선배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거예요.       


 질투심은 너무 흔하고, 동시에 너무 강렬한 감정이죠. 그래서 잘 다루어야 하는 감정이에요. 질투심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이의 고통이죠. 질투심은 과잉된 자의식을 가진 이들의 고통이죠. 온 통 자신 생각 밖에 없는 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죠.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이는 타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고통이 될 수도 있고, 한 인간을 성숙시키는 성장통이 될 수도 있어요. 


 전자의 고통은 피해야 할 방식이죠. 이 고통에 이르는 길은 쉽죠. 그냥 질투심에 휩쓸려 들어가면 돼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너를 파괴해버리거나, 너를 가질 수 없다면 나를 파괴해버리거나. 이것이 질투심을 다루는 가장 흔한 방법이죠. 하지만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듯, 간편한 것은 유해하죠.  그렇다면, 후자의 고통 즉 질투심이 성장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의식이 과잉된 이들은 언제나 성급하죠. 사랑도 그렇게 하려고 하죠. 온통 자신 생각밖에 없는 이들이 하는 사랑은 사랑의 요구죠. 질투심은 과잉된 자의식을 가진 이들의 폭력적인 사랑의 요구인셈이죠.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죠.") 질투심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조바심으로 사랑을 요구하지 말고, 묵묵히 사랑을 기다려야 해요. 어떻게 사랑을 기다려야 할까요? 자의식이 과잉된 이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그들이 누구를 사랑하건, 그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조바심을 내지 말고, 천천히 한 걸음씩,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받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해요. 질투심에 휩싸였다면, 먼저 아프게 물어야 해요. “나는 그녀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그녀의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될 거예요. 그때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나'를 사랑해주려는 '너'를 만나게 될 거예요. 잊지 말아요.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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