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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밀도

피해의식은 저마다 밀도가 다르다.

 피해의식은 저마다 밀도가 다르다. 모든 피해의식은 우리네 삶을 슬픔으로 몰아놓는다. 하지만 모든 피해의식이 같은 강도로 우리를 슬픔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다. 밀도가 높은 피해의식은 강도 높게 우리를 슬픔으로 밀어 놓고, 또 어떤 피해의식은 상대적으로 낮은 강도로 우리네 삶을 슬픔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다면 저밀도의 피해의식과 고밀도의 피해의식은 무엇일까?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은 가장 저밀도이고, ‘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은 가장 고밀도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의 또 다른 특성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억에는 ‘자발적 기억’과 ‘비자발적 기억’이 있다. 이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자발적 기억은 말 그대로 자신의 의지를 통해 기억해낼 수 있는 기억이다. 지금 눈을 감고 고등학교 때 몇 반이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자발적 기억이다. 반면 비자발적 기억은 자신의 의지로는 기억해낼 수 없고 어떤 외적 마주침이 있어야만 떠오르는 기억이다. 길거리를 지나가 어떤 향기를 맡았을 때,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이 불시에 펼쳐졌다면 그것은 비자발적 기억이다.      


저밀도 피해의식, ‘사실의 기억’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 가장 저밀도의 피해의식인 이유도 이제 설명할 수 있다. 피해 받은 ‘사실’이 피해의식을 만들 수 있다. 이 피해의식은 저밀도이기에 상대적으로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런가? ‘사실의 기억’은 또 다른 ‘사실의 기억’을 비자발적으로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사실의 기억’은 분명 상처 받은 사실에서 왔다. 이는 자발적 기억이다. 그리고 이 자발적 기억(가난)이 피해의식화 되었다면, 다른 기억(행복)들은 비자발적 기억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상처 받은 사실 때문에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선재’를 생각해보라. 그가 자발적으로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선재’는 계속 피해의식에 휩싸여 살아가게 될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선재’는 정신없이 바쁜 출장 중 허기를 달래기 위해 들어선 허름한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맛에서 비자발적이 기억이 불시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사실의 기억’ 말이다. 그렇게 불청객처럼 찾아든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비자발적 기억으로 그의 피해의식(“무조건 돈이야.”)은 조금씩 옅어져 갈 테다. 이처럼,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은 그 밀도가 가장 낮다. 운이 좋으면 자연스레 치유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살아가면서 마주칠 크고 작은 좋은 만남(좋은 음식‧책‧음악‧영화‧친구‧연인‧선생 등등)을 통해 극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 가장 저밀도인 이유는 또 있다. ‘사실의 기억’으로서 발생한 피해의식은 그 피해의식에 매몰되기보다 거리 두어 성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의 기억’이 피해의식을 촉발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명한 현실(사실)에 기반 해 있다. 그런 피해의식은 그 자체를 거리 두어 성찰해볼 가능성이 높다. 강도(가난)을 당한 사실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는 분명 피해의식(“언제든 강도를 만날 수 있어”)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피해의식에 매몰되기보다 강도를 당하지 않을 ‘현실’적으로 대안을 고민해볼 여지는 있다. 물론 이 역시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고밀도 피해의식, ‘상상의 기억’

     

 ‘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 가장 고밀도인 이유 역시 이제 알 수 있다. 피해 받은 사실이 아니라 상상이 피해의식을 만들 수도 있다. 이 피해의식은 상대적으로 벗어날 가능성이 가장 낮다. 왜 그런가? ‘상상의 기억’은 또 다른 ‘상상의 기억’을 비자발적으로 촉발하기 때문이다. ‘상상의 기억’은 조작‧왜곡‧편집된 기억이지만 자발적 기억이다.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 역시 어떤 마주침에 의해서 비자발적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떠오른 비자발적 기억 역시 조작‧왜곡‧편집된 ‘상상의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


 ‘서희’는 가난했지만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가진 친구와 떡볶이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이는 ‘사실의 기억’이다. 그렇다면 ‘서희’는 우연히 그때의 떡볶이와 비슷한 맛을 가진 떡볶이를 먹게 되면 그때의 ‘사실의 기억’이 떠오를까? 즉, 살아가면서 마주칠 크고 작은 만남을 통해 피해의식에 균열을 낼 ‘사실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을 테다.


 떡볶이(우연적 마주침)을 통해 과거의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소환되더라도, 함께 떡볶이를 먹었던 그 친구의 표정은 우울과 잿빛으로 조작‧왜곡‧편집된 기억(피해의식을 정당화할 기억)으로 떠오를 테다. 그렇게 ‘서희’의 피해의식(“돈 없으면 죽어야 돼.”)은 더욱 견고해져 갈 테다. ‘서희’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는지만, ‘선재’에 비해 턱 없이 낮은 가능성일 테다. ‘상상의 기억’에 사로잡힌 이들의 비자발적 기억은 ‘상상의 기억’일 개연성이 높은 까닭이다.

      

 ‘상상의 기억’이 촉발한 피해의식이 가장 고밀도인 이유는 또 있다. 이 피해의식은 거리 두어 성찰할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상처 때문에 발생한 피해의식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피해의식 아닌가? 이 피해의식은 좀처럼 성찰하기 어렵다. 그 피해의식을 촉발한 기억은 실제로는 없는 상상이기 때문이다. 이 피해의식을 가진 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어렵고,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는 더욱 어렵다. ‘상상의 기억’으로 쌓아올린 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은 누군가와 공감하고 교감하며 대화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피해 받은 기억은 피해의식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사실의 기억’이 정당화하는 피해의식과 ‘상상의 기억’이 정당화하는 피해의식은 그 밀도가 다르다. 전자는 저밀도이고 후자는 고밀도이다. 사실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은 타인과 공감하고 교감하며 대화할 수 있는 틈이 넓은 반면, ‘상상의 기억’으로 정당화된 피해의식은 극복하기 매우 어렵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에 피해 달아나려는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유령(피해)을 피해 달아나려는 마음(피해의식)은 쉬이 바로 잡을 수 없다.


    

우리의 피해의식, ‘사실-상상의 기억’

     

 ‘선재’와 ‘서희’는 세상에 존재할까? 즉, 달리 말해, 완전한 사실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와 완전한 ‘상상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가 존재할까? 거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드물 테다. 전자는 ‘컴퓨터’이고, 후자는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실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컴퓨터’일 테고, 완전한 ‘상상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정신병’일 테다. ‘컴퓨터’와 ‘정신병’은 우리네 일상에서 매우 드문 존재들이다.  

    

 그렇다. 우리의 기억은 ‘컴퓨터’와 ‘정신병’ 그 사이에 있다. 즉, 우리의 피해의식은 '사실의 기억'과 '상상의 기억'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있는 기억에 의해 촉발된 기억이다. 그 기억은 ‘사실-상상’의 기억이다. 보편적인 피해의식은 ‘사실’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의 왜곡‧조작‧편집한 ‘상상’이 더해진 기억으로부터 촉발된다. 누군가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시절 가난을 실제로 경험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어느 정도의 상상이 덧대어져 만들어졌을 테다.

      

 우리의 피해의식이 ‘사실-상상의 기억’으로부터 촉발되었다면, 우리의 피해의식은 저마다 밀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피해의식도 그 밀도가 다르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동일한 피해의식 역시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밀도가 매순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피해의식의 밀도를 규명하는 두 가지 변수가 매순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변수는 ‘사실’과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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