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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을 결정짓는 두 변수, ‘사실’과 ‘상상’

피해의식의 밀도를 결정짓는 두 변수, ‘사실’과 ‘상상’     

 피해의식의 밀도를 결정짓는 두 가지 변수가 있다. ‘사실’과 ‘상상’이다. 이 두 가지 변수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먼저 ‘사실’부터 이야기해보자. ‘사실’은 과거의 현실적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거 현실적 조건(사실)에 따라 피해의식은 그 밀도를 달리하게 된다. 쉽게 말해, 지독한 가난한 경험을 이들의 피해의식은 상대적으로 고밀도일 가능성이 크고, 평범한 가난을 경험한 이들의 피해의식은 상대적으로 저밀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즉, 피해 받은 사실의 상처 깊으면 피해의식이 고밀도일 가능성이 크고, 상대적으로 피해 받은 사실의 상처 얕으며 피해의식이 저밀도일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상상’이다. 과거 같은 크기의 가난(현실적 조건)을 경험했던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둘의 피해의식은 같은 밀도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은 크기의 ‘사실’(상처)을 바탕으로 얼마나 더 ‘상상’(왜곡‧조작‧편집)했느냐에 따라 피해의식의 밀도는 현저히 차이가 난다. 이것이 지독히 가난했지만 상대적으로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덜 한 이가 있고, 평범한 가난(어찌 보면 부유했을 법한 조건)을 경험했으면서도 피해의식이 심한 이가 존재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해의식의 밀도 차를 결정짓는 두 변수(사실과 상상)는 동등한 위상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실’보다 ‘상상’이 더 큰 변수다. 피해의식에서 ‘사실’이라는 변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불행의 ‘사실’만큼 행복의 ‘사실’ 역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전적으로 불행한 사실만으로 구성된 삶도 없고, 전적으로 행복한 사실만으로 구성된 삶도 없다.      

 행복의 뒷면에는 언제나 불행이 있고, 불행의 뒷면은 언제나 행복이 있다. 과거 불행한 현실적 조건(사실)이 있을 수 있다. 이 사실(가난)이 피해의식을 촉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피해의식을 완화할 사실(“작은 단칸방이어서 그때 우리는 참 행복 했구나”) 역시 불러일으킨다. ‘사실’은 피해의식을 촉발하지만 언제나 그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사실은 피해의식의 밀도 차를 결정짓는 지배적 변수는 아니다.


피해의식의 지배적 변수, ‘상상’

   

 반면 ‘상상’은 피해의식의 밀도차를 결정짓는 지배적 변수다. ‘상상’은 ‘사실’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진’은 딱히 큰 가난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넉넉한 살림이 아니어서 게임기와 컴퓨터는 갖지 못했다. 그 ‘사실’은 가난에 관한 피해의식을 촉발하겠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월급날 따뜻한 방안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통닭을 먹은 행복한 ‘사실’ 역시 불러일으킬 테다.


 하지만 성인된 ‘진우’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가난에 대한 지독한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바로 ‘상상’ 때문이다. 게임기와 컴퓨터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과거의 기억을 왜곡‧조작‧편집해서 ‘상상’했다. 이 ‘상상’은 치명적이다. 그 상상이 커져갈 때, ‘진우’는 자신의 상상 안에서 세상 누구보다 가난했고 상처 입은 아이가 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상은 피해의식의 밀도를 결정짓는 지배적 변수다.


 바로 여기에 한 사람의 동등한 피해의식의 밀도가 매순간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진우’는 언제 피해의식이 심해질까? 사실이 아니라 상상의 기억에 치우치는 만큼 피해의식의 짙어진다. 반면, ‘상상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해체하여 ‘사실의 기억’을 복원하는 만큼 피해의식은 옅어지게 된다.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사실-상상’의 기억이다. 그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사실’과 ‘상상’ 사이에서 어디 즈음 서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피해의식 역시 그 밀도를 달리 하게 된다.

        

 세 가지 종류의 피해의식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하다. 왜 그런가? 피해의식 때문에 삶이 점점 더 슬픔으로 내몰리고 있을 때, 피해의식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피해의식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 아닌가? 그런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 자체를 문제 삼는 것으로 피해의식은 해결되지 않는다. 생명체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결코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을 문제 삼을 때 먼저 우리의 ‘기억’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피해의식이 ‘사실의 기억’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상상의 기억’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실-상상의 기억’으로부터 온 것이지 차분히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피해(상처) 받았다는 기억은 사실인가? 아니면 상상인가? 내가 피해(상처) 받은 기억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상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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