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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피해의식과 무의식

“불륜 하는 애들은 싹 다 감옥에 처넣어야 돼”
“왜 급발진이야. 그거 너 피해의식이 아니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유빈’은 유명인들의 불륜에 대한 가십 기사를 보고 분노를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빈’의 친구는 그 분노에 대해 피해의식이 아니냐고 물었다. ‘유빈’은 더 큰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친구에게 화를 냈다. ‘유빈’은 왜 그랬을까? ‘유빈’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종종 맥락 없는 흥분과 분노를 표출될 때가 있다. 피해의식은 왜 이런 난처한 상황들을 발생시키는 걸까?   

    

 피해의식은 어렵다. 나의 피해의식을 파악하고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의 피해의식을 파악하고 다루는 것은 더욱 어렵다. 왜 그럴까? 그것은 피해의식은 우리의 내밀한 ‘무의식’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무엇인가? 이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기초 세운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에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면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표상을 의식적이라고 부르고이것을 의식적이라는 용어의 유일한 의미로 간주하자그리고 잠재적인 표상에 대해서는만일 그 표상이 정신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기억과 경우와 같이)가 있다면 그 잠재적 표상에 무의식적이란 표현을 사용하도록 하자정신분석에서의 무의식에 관한 노트』 지그문트 프로이트     


 ‘의식’이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표상(생각)”이고 무의식은 우리의 기억에 있지만 “잠재적인(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표상(생각)”이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의식’은 자신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합리적‧논리적‧이성적 마음이다. 반면 ‘무의식’은 자신이 결코 명료하게 파악할 수 없는 비합리적‧비논리적·감정적인 혼란한 마음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뒤엉켜 있다고 밝히면서 인간은 ‘의식’보다 ‘무의식’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무의식은 스스로 의식화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이 ‘무의식’이란 개념을 ‘억압’과 ‘저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억압’과 ‘저항’은 무엇일까? ‘억압’은 무의식의 형성과 관계되고, ‘저항’은 ‘무의식’의 표현과 관계된다. 먼저 ‘억압’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억압된 것이 무의식의 원형이다자아와 이드』 지그문트 프로이트


 무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바로 ‘억압’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억압’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일종의 상처다. 이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이 금지당할 때 발생하는 상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큰 상처(트라우마‧콤플렉스)를 겪게 될 때가 있다. 이런 큰 상처가 바로 ‘억압’이다. 어린 시절 집에 큰 불이 나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이는 아이에게 ‘억압’이다. 왜 그런가? 그 사고로 인해서 아이는 쾌락(부모님과 행복한 시간)을 금지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억압’은 어떤 과정을 통해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일까?   

   

억압 과정의 본질이 본능을 대변하는 어떤 표상을 제거하거나 지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이 의식의 영역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무의식에 관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억압’의 본질이 ‘의식’의 영역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는 어려운 논의가 아니다. 어린 시절 화재를 경험한 아이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 아이가 자신의 상처(억압)를 계속 ‘의식’ 속에 담아둘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이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처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 밀어두게 되는데, 바로 이 영역이 ‘무의식’이다. 억압은 너무나 큰 상처이기에 매순간 명확하게 ‘의식’의 영역 외부(무의식)에 자리 잡는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 속에 억압되어 있는 것의 전부를 기억해낼 수 없다그리고 기억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억압의 본질적인 부분일 수 있다쾌락원칙을 넘어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처럼 “억압된 것이 무의식의 원형”이 된다. 여기서 ‘무의식’의 특징이 하나 알 수 있다. ‘무의식’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에 ‘무의식’이다. 즉, 어떤 기억을 한 번 ‘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 영역으로 밀어내면 이후 스스로 그것을 다시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끔찍했던 화재의 기억이 ‘무의식’화되면 아이는 이제 그 기억 스스로 ‘의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냐? 아니다. ‘억압’으로 인해 발생한 ‘무의식’은 스스로 발견할 수는 없지만, 우발적인 타자(사람‧물건‧상황등등)에 의해서 불시에 발견될 수 있다.

    


무시와 놀람, 무의식이 발견될 때의 반응

     

여기서 ‘저항’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무의식’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바로 ‘저항’이다. 깜깜한 ‘무의식’의 방에 우연히 누군가 빛을 비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즉, ‘무의식’ 안에 숨겨 두었기에 스스로는 결코 ‘의식’할 수 없었던 기억이 우연히 누군가(혹은 어떤 상황)에 의해 ‘의식’화될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저항’하게 된다. 이 ‘저항’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난해한 정신분석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 정신분석학자 브루스 핑크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 

      

무의식적 현시물이 발견되면 우리는 즉시 그것을 수정하거나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듯이 무시해버리기 일쑤다. (중략무의식적 현시물들은 종종 놀람을 수반한다.” 라캉과 정신의학』 브루스 핑크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이 발견될 때 반드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이 ‘저항’에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다. ‘무시’(수정‧외면) 혹은 ‘놀람’이다. 다시 화재의 기억을 가진 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넌 팔이 왜 그래?” 아이의 팔에 있는 화상 자국을 보며 친구들이 물을 수 있다. 이는 아이의 ‘무의식’이 우발적 타자에 의해 발견되려는 상황이다. 그때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 어제 왜 일찍 집에 갔어?”라는 말로 화제를 서둘러 ‘수정’하려 할 수 있다. 혹은 “어, 별거 아니야”라는 말로 질문을 ‘외면’해버릴 수도 있다. 이처럼 ‘무의식’이 발견될 때 흔히 ‘무시’(수정‧외면)의 반응으로 ‘저항’하게 된다.     


 타자에 의해 무의식이 발견될 때 또 다른 ‘저항’이 있다. ‘놀람’이다. 여기서 ‘놀람’은 단순히 예기치 않은 순간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극심한 감정적 동요를 의미한다. “넌 팔이 왜 그래?” 단순한 호기심의 질문에 그 아이는 느닷없이 화를 낼 수도 있다. “넌 왜 남의 일에 관심이 많냐? 니 일이 잘해!” ‘무의식’이 발견될 때 흔히 거부감, 공격성, 짜증, 반감, 분노 등이 표출되곤 한다. 이는 모두 ‘놀람’(감정적 동요)이 야기한 반응이다.

     

 ‘무의식’이 발견될 때 왜 이런 ‘저항’을 하게 되는 걸까? 공포스럽고 음습하고 혐오스러워 결코 자신의 것이라 여기기 싫은 자신의 물건들을 껌껌한 방에 모아두었다고 해보자. 그때 누군가 그 방에 불을 켜려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그 방은 자신의 방이 아니라면 고개를 돌려 ‘무시’하거나 혹은 화들짝 ‘놀라서’ 불을 끄라고 화를 내게 된다. 그 방의 물건들이 계속 마주하고 있다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아이는 왜 화재의 기억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두었을까? 그것이 의식 속에 있으면 삶을 견디기 어려워서다. 그러니 타자에 의해 그것이 발견되려 할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저항’할 수밖에 없다. 그 ‘저항’이 없다면 아이는 끔찍했던 화재의 기억이 다시 소환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무시’와 ‘놀람’이라는 ‘저항’은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자기보호 반응인 셈이다. 이는 피해의식의 내적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다시 ‘유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유빈’은 불륜에 관한 피해의식이 있다. 그 피해의식은 왜 발생했을까? 진심으로 신뢰했던 배우자의 외도에 의해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억압!) 배우자의 컴퓨터에서 배우자와 낯선 이가 알몸으로 웃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을 때, 유빈은 호흡이 가빠져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유빈’의 상처는 지금도 ‘의식’ 속에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일정 정도 그 기억을 무의식으로 밀어내었다. 배우자의 외도를 계속 ‘의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유빈’은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유빈은 자신의 상처를 ‘의식’적인 기억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억압’으로 인한 ‘무의식’ 형성!) 이것이 유빈이 그 상처를 스스로 ‘의식’할 수 없게 된 이유다. 유빈에게 배우자의 외도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되었다. 이는 ‘무의식’의 논리와 같다. ‘무의식’과 피해의식은 모두 감당하기 힘든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상처(기억)를 ‘의식’의 영역에서 밀어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의식’이 그런 것처럼, 피해의식 역시 타자와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 불시에 다시 소환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유빈’이 왜 (다른 이들이 보기에) 맥락 없는 흥분과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저항!)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유명인들의 불륜 이야기에 ‘유빈’은 왜 과도하게 흥분했을까? 의식적으로야, 윤리‧도덕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실은 ‘무의식’으로 밀어두었던 상처(배우자의 외도)가 간접적으로 ‘의식’화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유빈’이 자신의 상처를 ‘무의식’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자신의 상처가 애초부터 ‘의식’의 영역에 있었다면, ‘유빈’은 유명인들의 불륜을 비난하는 대신 배우자를 비난했을 테다. 합리‧논리‧이성적으로 생각(의식)했을 때, 불륜으로 ‘유빈’에게 심대한 상처를 준 것은 유명인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배우자이니까 말이다. 


 “그거 너 피해의식이 아니야?” 친구의 말에 ‘유빈’은 왜 과도하게 분노했을까? 이 역시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말은 ‘무의식’으로 밀어두었던 상처(배우자의 외도)가 직접적으로 ‘의식’화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유빈’이 과도한 분노를 표출했던 이유다, ‘무의식’이 발견될 때는 극심한 감정적 동요(놀람)을 겪게 되고, 이는 분노로 표출되곤 하니까 말이다. 

     

 물론 피해의식이 반드시 ‘유빈’과 같은 양상(분노)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빈’과 유사한 상처(배우자의 외도)를 갖고 있는 이들은 많다. 이들 중 어떤 이는 TV에서 유명인들의 불륜 사실이 나오면 황급히 채널을 돌리기도 한다.(수정) 또 친구가 자신의 상처를 기억나게 할 이야기를 하면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거나 못들은 체 딴청을 피우기도 한다.(무시) 이는 모두 ‘무의식’이 발견되려 할 때 발생하는 ‘저항’이다. 

     

 이처럼 피해의식과 무의식의 내적 원리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피해의식과 ‘무의식’은 그 기원과 특성,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양상 모두 매우 유사하다. 둘의 기원은 같다. 피해의식과 ‘무의식’은 ‘억압’으로부터 온다. 둘 모두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발생한다. 둘의 특성도 매우 유사하다. 피해의식과 ‘무의식’은 스스로 ‘의식’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무의식처럼, 피해의식 역시 스스로 의식화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또한 피해의식과 ‘무의식’은 그것이 드러나는 양상 역시 ‘저항’이라는 측면으로 유사하다. 무의식이 어떤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 드러날 때 무시와 놀람(감정적 동요)이 동반되는 것처럼, 피해의식 역시 그렇다. 피해의식 역시 누군가에 의해 폭로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거나 극심한 놀람(감정적 동요)을 겪게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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