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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피해'무의식' 피해'전의식'

인간의 세 가지 마음 : 의식, 무의식, 전의식

피해의식이 ‘무의식’과 관계된 것이라면, 피해의식에는 세 가지 종류의 피해의식이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관해 조금 더 알아보자.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개념화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세 가지 층위로 구분했다. ‘의식consciousness’, ‘전의식pre-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이다. 이 세 마음은 바다에 떠 있는 빙하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바다에 떠 있는 빙하(마음 전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바다 위로 드러나 있는 부분(의식), 바다 아래 잠겨 있는 부분(무의식), 그리고 그 사이에 드러났다 잠겼다하는 부분(전의식). ‘의식’은 전체 빙하 중 바다 위로 돌출된 부분으로, 이는 인간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다. ‘무의식’은 바다 아래 완전히 잠겨 있는 부분으로, 이는 스스로 인식할 수 없는 마음이다. ‘전의식’은 바다의 출렁거림에 의해 드러났다 잠겼다하는 부분으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인식되기도 하고 인식되지 않기도 하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을 알면 피해의식 역시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 ‘무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 ‘전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종류의 피해의식을 통해 우리의 피해의식을 진단해볼 수 있다. 우리의 피해의식은 셋 중 어느 것에 가까울까? 길거리에서 뜨거운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이 있다. 이 장면을 ‘성민’, ‘혜선’, ‘유선’ 세 사람이 보았다고 해보자.      



피해'의식' : ‘의식’의 피해의식


“아, 이거 내 피해의식이구나” 


 키스 장면을 본 ‘성민’은 순간 이유 모를 불편함과 불쾌함이 밀려들었다. 그 순간 ‘성민’은 바로 깨달았다. 그 불편함과 불쾌함은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촉발된 감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민’은 자신도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은데, 긴 시간 연애를 하지 못해서 피해의식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피해의식 때문에 길거리에서 타인의 시선은 신경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불편함과 불쾌함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이다. (이를 피해‘의식’이라고 하자.) 종류와 밀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에게나 피해의식은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의 피해의식은 분명하고 명료한 ‘의식’ 속에 있다. 이들은 피해의식이 있지만,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해 명료하고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즉, 자신에게 피해의식이 있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인지도 명료하고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피해의식이 촉발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이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이 피해‘의식’은 가장 밀도가 낮은 피해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해의식이 왜 문제인가? 그것이 야기하는 부정적 감정(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에 잠식당하기 때문이다. ‘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은 이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성민’은 키스하는 연인들을 보고 불편했고 불쾌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했다.      


 물론 이 ‘의식’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사랑에 뛰어들지 못하고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만 있는 못난 자신을 정직하게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그 못난 자신을 직면하지 못해 행복한 연인들을 아름답게 보기는커녕 불쾌함과 불편함의 시선으로 대하지 않았던가. 그 비루한 자신마저 정직하게 직면해야 한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자신)을 직면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피해‘의식’은 잠시의 고통 뒤로 조금 더 나은 삶이 펼쳐지게 할 수 있다. ‘성민’은 피해의식의 부정적 감정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의식’한 이들은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성민’은 조금 더딜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준비를 해나갈 것이다. 그것이 연인들을 보며 느꼈던 불편함과 불쾌감을 옅어지게 할 해법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을 ‘의식’하고 있는 이는 이들은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잠재성을 이미 품고 있다. 그래서 이 피해의식은 밀도가 가장 낮다. 



피해‘무의식’ : ‘무의식’의 피해의식


“저럴 거면 모텔을 가야지. 공공장소에서 경우 없이 뭐하는 짓이야!” 


 ‘혜선’ 역시 길거리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을 보고 불쾌감과 불편함에 휩싸였다. ‘혜선’은 연인들의 매너‧윤리‧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연인들을 질타했다. ‘혜선’은 왜 그랬을까? 우리 사회에 매너와 윤리, 도덕을 바로세우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녀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자신의 피해의식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혜선’은 첫사랑에서 큰 상처 받은 이후 연애를 못하고 있다. ‘혜선’은 그로인해 피해의식이 있다. 길거리에서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을 보며 느꼈던 은근한 불쾌함과 불편함이 자신의 피해의식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무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이다. (이것을 피해‘무의식’이라고 하자.) 어떤 이들의 피해의식은 스스로 결코 인지할 수 없는 ‘무의식’ 속에 있다. 이들은 피해의식이 있지만,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자신의 피해의식이 촉발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을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자신은 피해의식이 없다고 믿거나 혹은 그 상황은 자신의 피해의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혜선’이 매너‧윤리‧도덕성의 담론으로 연인들을 질타한 이유다. 이처럼, ‘무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은 그럴듯한 대의나 명분, 혹은 신념이나 이념 등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자신이 느꼈던 불편‧불쾌함이 자신의 마음(피해의식)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기에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니까 말이다. 뭔가 많이 아는 것 같은 지식인들이나 혹은 강한 신념‧이념을 가진 것 같은 (정치‧종교) 사회 지도층들 중에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지식과 신념‧이념은 어디서 왔을까? 그들의 지식은 자신의 피해의식을 ‘의식’하지 못해 발생한 엉뚱한 해석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찾은 그럴듯한 변명이다. 또 그들의 신념‧이념은 자신의 피해의식을 ‘의식’하지 않기 위한 쌓아올린 두터운 방어막이다. 

    

 피해‘무의식’은 가장 밀도 높은 피해의식이라 할 수 있다. 피해의식을 ‘의식’할 수 없을 때, 피해의식이 야기하는 부정적 감정(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에 가장 크게 잠식당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해 알길 없는 ‘혜선’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표면적으로는 매너‧윤리‧도덕적 삶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살아가겠지만, 내적으로는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에 잠식당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혜선’은 누구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피해의식을 ‘의식’할 때만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이다. 자신의 피해의식이 ‘무의식’ 속에 있을 때, ‘혜선’은 앞으로 영원히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 행복한 연인들을 보며 분노하고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이 길어지면 무기력해지고 억울하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의식’되지 않은 피해의식은 우리네 삶을 큰 슬픔으로 몰아넣는다. ‘무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은 가장 경계해야 할 피해의식이다. 이 피해의식은 그 밀도가 가장 높기에 그 피해의식이 옅어질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피해‘전의식’ : ‘전의식’의 피해의식


“이거 내 피해의식일수도 있겠지만, 길거리에서 저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연인을 본 ‘유선’ 역시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꼈다. 이 역시 ‘유선’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유선’의 불쾌함과 불편함은 기묘한 구석이 있다. ‘성민’처럼 명확하게 그 이유를 인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혜선’처럼 그 이유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연인들의 키스 장면에서 느낀 불쾌함과 불편함이 못내 찜찜하다. 그것이 자신의 피해의식과 관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다. ‘유선’이 그 상황을 ‘혜선’처럼 전혀 엉뚱하게 해석(매너‧윤리‧도덕)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이것은 ‘전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이다. (이것을 피해‘전의식’이라고 하자.) 피해‘의식’(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은 분명하게 인지되고 피해‘무의식’(무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은 전혀 인지되지 않는다면, 피해‘전의식’은 피해‘의식’과 피해‘무의식’ 사이에 있다. 이는 바다의 출렁거림에 의해 보였다 안보였다는 빙하의 부분처럼 알듯말듯한 피해의식이다. 피해‘전의식’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잠재되어 있으나 의식화될 수 있는” 피해의식이다.  

    

 이 피해‘전의식’은 가장 보편적인 피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피해의식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이는 드물다. 피해의식이 무엇인가?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자신을 과도하게 방어해야 할 만큼 깊은 상처를 어떻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의식’할 수 있을까. 그런 상처는 어느 정도 ‘무의식’ 속에 가라앉혀 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피해의식을 완전히 ‘무의식’ 속에 넣어둔 이도 드물다. 이미 경험했던 일을 ‘의식’에서 완전히 몰아내어 전혀 기억되지 않는 ‘무의식’ 속으로 밀어두는 것 역시 흔한 일은 아니다.   

   

 우리의 피해의식은 출렁거리는 물살에 의해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전의식’ 부분에 있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피해의식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정확히 인식하진 못하지만 어느 정도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피해의식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해 정확히 성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엉뚱한 지식과 신념으로 자신의 피해의식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드러나려고 할 때 흔히 “이거 내 피해의식일수도 있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게 되는 이유다.      


 ‘유선’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바다의 출렁임처럼 살아갈 테다. 바다의 출렁임으로 수면아래 빙하가 보이는 만큼 피해의식이 옅어져 기쁜 삶으로 나아갈 테다. “이거 내 피해의식 때문인가?” 피해의식이 ‘의식’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받을 준비를 할 테다. 그렇게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삶의 변화를 모색하게 될 테다. 또 바다의 출렁임으로 빙하가 수면 아래 잠기는 만큼 피해의식이 짙어져 슬픈 삶으로 나아갈 테다. “길거리에서 저러는 건 매너가 아니지” 피해의식이 ‘무의식’에 잠긴 만큼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삶은 멀어질 테다. 그렇게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에서 잠식당해 살아가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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