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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전의식'을 확장하라!

피해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피해의식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피해의식을 ‘의식’화하면 된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우리의 피해의식은 (결코 알 수 없는) ‘무의식’과 (알듯 말듯한) ‘전의식’ 사이 어디 즈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피해의식을 어떻게 의식화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프로이트라면 어떻게 답해주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어떤 것이 어떻게 의식화되느냐?’ 이 질문은 이제 좀 더 유리하게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어떤 것이 어떻게 전의식화되느냐?’ 자아와 이드』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어떤 것이 어떻게 ‘의식’화되느냐?”라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어떻게 ‘전의식’화되느냐?” 이는 당연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은 ‘무의식-전의식-의식’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대상이 ‘무의식’에 있을 때, 그것은 ‘의식’화될 수 없다. ‘무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의식’되지 않는 마음이니까. 반면 어떤 대상이 ‘전의식’에 있다면 그것은 ‘의식’화될 수 있다. 여기서 ‘전의식’의 특징을 하나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의식은 무의식보다 의식에 훨씬 가까이 있는 것 같다자아와 이드』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전의식’은 ‘무의식’처럼 잠재되어 있지만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특별한 저항을 받지 않고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전의식’의 영역에 있는 것은 가물가물하더라도 이내 명료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전의식’은 ‘무의식’보다 ‘의식’과 더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프로이트가 “어떻게 ‘의식’화되느냐?”라는 질문을 “어떻게 ‘전의식’화되느냐?”로 바꾸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말한 이유다. ‘무의식’은 결코 ‘의식’화될 수 없지만, ‘전의식’은 별 어려움 없이 ‘의식’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의식의 확장

     

 이제 우리는 ‘의식화’는 ‘의식-전의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전의식화’는 ‘전의식-무의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대상을 ‘전의식’화한다는 말은, ‘무의식’에 있는 어떤 대상을 ‘전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전의식의 확장’이라고 하자. 즉,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무의식’을 알듯말듯한 ‘전의식’ 영역으로 포섭해가는 과정을 ‘전의식의 확장’으로 정의하자. 그렇다면 이 전의식의 확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다시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떤 것이 어떻게 전의식화되느냐?’ 그 답변은 그에 상응하는 언어 표상과 관련맺음으로써라는 것이 될 것이다이러한 언어 표상은 기억의 잔재물이다자아와 이드』 지그문트 프로이트    

    

 “어떤 대상이 어떻게 전의식화되느냐?” 이 질문에 프로이트는 “언어표상과 관련맺음으써” 가능하다고 답한다. 그리고 이 언어표상은 “기억의 잔재물”이라고 말한다. 즉 ‘전의식의 확장’은 “기억의 잔재물”, 정확히는 그것의 복원과 관계되어 있다. 우리는 경험했던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경험 중 일부는 쓰고 남아서 버려진 물건들처럼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무의식’에 저장된다. ‘무의식’에 있는 어떤 것을 ‘전의식’화한다는 것은 그 “기억의 잔재물”들을 복원한다는 의미다.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린 시절, 사진 속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그때 그 이름은 ‘무의식’에 있기에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무의식’을 ‘전의식’화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기억의 잔재물”들에 복원하려고 집중하면 된다. 예를 들어, 그 시절 자주 보았던, 하지만 잊고 있었던 그 친구의 가방(기억의 잔재물)을 생각해내면 된다. 그러면 그 가방에 쓰인 그 친구의 이름(언어표상!)이 생각 날듯말듯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전의식) 이것이 바로 ‘전의식의 확장’이다. 그렇게 그 이름이 ‘전의식’ 상태에 이르면, 이내 그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나게 된다.(의식화)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무의식’에 있는 어떤 것이 ‘전의식의 확장’을 통해 ‘의식’화에 이르게 된다.

      


피해‘전의식’의 확장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을 어떻게 ‘의식’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다. 피해의식의 ‘의식’화는 피해‘전의식’의 확장으로 가능하다. ‘전의식’의 확장이 “기억의 잔재물”의 복원과 관계해 있듯이, 피해‘전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전의식’ 역시 ‘무의식’ 속에 있는 “기억의 잔재물”의 복원과 관계되어 있다. 피해‘전의식’이 어떻게 확장되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명우’는 작은 키 때문에 상처 받아 생긴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이 피해의식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적이다. 자신에게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피해의식이 전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전의식’적인 측면이 있다. ‘명우’는 삶의 이런저런 문제 앞에서 “그건 내가 키 작아서 그래”라는 확신(피해‘무의식’)에 잠식당하지만, 가끔은(혹은 동시에) “이건 키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의구심(피해‘전의식’)이 스쳐갈 때가 있다.    

  

 “이거 내 피해의식인가?” 이런 의구심(피해‘전의식’)이 스쳐지나갈 때, 이를 서둘러 외면해버리면 피해의식은 더 깊은 ‘무의식’으로 가라앉게 된다. 이는 피해‘전의식’이 확장에 실패한 경우다. 반면, 그런 의구심이 찾아올 때 집중해서 “기억의 잔재물”을 복원해내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그때 ‘무의식’ 속에 있어서 기억나지 않았던 일들을 가물거리는 마음 상태(전의식)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 경우가 피해‘전의식’이 확장된 경우다. 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키 이야기만 나오면 발끈하는 게 혹시 내 피해의식인가?’ ‘명우’에게 이런 의구심이 스쳐지나갔다고 해보자. 이때 이 피해‘전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 ‘명우’는 학창시절 친했던 친구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는 이유로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명우’는 그것이 키가 작은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확신(피해‘무의식’)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혹시 그게 내 피해의식 때문이었나?’라는 의구심(피해‘전의식’)이 들 수 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집중하면 ‘무의식’ 속에 있어서 기억나지 않던 그 친구와 관련된 “기억의 잔재물”이 가물가물거리는 ‘전의식’ 상태로 진입할 수 있다.(전의식화!) 이렇게 ‘무의식’ 속에 있던 피해의식을 ‘전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피해‘전의식’의 확장이다. 이렇게 확장된 피해‘전의식’은 이내 ‘의식’화된다. 친구와 관련된 하지만 잊고 있었던 어떤 기억이 떠오를 듯 말듯한 마음은 이내 하나의 명료한 기억을 끌어낸다. 그 친구는 유독 자신과 친했던 친구들에게만 어깨동무를 했다는 “기억의 잔재물”이 명료하게 기억난다.(의식화!) 그렇게 ‘명우’는 다툼을 유발했던 그 친구의 행동(어깨동무)은 무시가 아니라 애정의 표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피해의식의 의식화!)      


 이처럼, 무의식 속에 있던 “기억의 잔재물”을 복원하려는 노력으로 피해‘전의식’의 확장은 가능하다. 같은 방식으로 피해의식의 ‘의식’화는 전방위로 가능하다. ‘명우’는 좋아했던 친구에게 고백이 거절당한 것은 키 때문이 아니라 나의 조바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다. 또 취업이 번번이 실패하는 것은 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 부족 때문이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낼 수 있다. 이렇게 피해‘전의식’을 확장할 때, 자신의 피해의식을 더욱 명료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되고,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될 때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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