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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전의식’적이다.

‘전의식’, ‘무의식’과 ‘의식’의 완충지대


피해의식은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조금씩 극복해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의식’은 어떻게 ‘의식’화될 수 있을까? 여기에 ‘전의식’의 중요성이 있다. ‘전의식’은 무엇일까?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두 종류의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나는 잠재되어 있으나 의식화될 수 있는 것(전의식)이고하나는 억압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순조롭게 의식화될 수 없는 것(무의식)이다… 역동적인 의미가 아니고 오직 서술적으로만 잠재적인 것을 우리는 전의식이라고 부른다자아와 이드』 지그문트 프로이트 

      

 ‘전의식’은 “잠재되어 있으나 의식화될 수 있는” 마음이다. ‘전의식’은 ‘의식’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다. 이는 ‘의식’처럼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식’처럼 전혀 인지할 수 없는 마음 역시 아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의식’과 ‘잠재의식’으로 구분한 뒤, ‘잠재의식’을 다시 ‘무의식’과 ‘전의식’으로 구분한다. 



 ‘전의식’은 잠재되어 있어서 즉각적으로 ‘의식’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무의식’인 것은 아니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 ‘의식’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전의식’은 과거에 인식되었던 기억 중에서 지금은 분명하게 의식되지 않지만 조금만 집중하고 노력하면 곧 떠올 수 있는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전의식’은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일까? ‘무의식’과 ‘의식’은 직접적으로 맞닿을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 인간은 내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일 것이고, 외적으로는 사회‧문화적인 제재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의식’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있는 일종의 완충지대다. ‘전의식’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무분별하고 충동적인 감정‧욕망을 정제해서 ‘의식’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무의식’이 ‘의식’으로 도달하려면 반드시 ‘전의식’을 거쳐야 한다. ‘무의식’은 ‘의식’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의식’화될 수는 없다. ‘전의식’이라는 완충지대를 통해서 의식화된다.   


   

피해의식은 ‘전의식’적이다.


 우리의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이것이 직접적으로 ‘의식’화될 때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니 피해의식이 ‘의식’화되려면 ‘전의식’을 거쳐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피해‘전의식’에 집중해야 한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피해‘의식’과 피해‘무의식’은 별도로 깊이 논의할 필요가 없다.


 피해‘의식’(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은 엄밀히 말해 이미 피해의식이 아니기에 논의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해 분명하고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 피해의식을 극복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무의식’(무의식으로서의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심각한 피해의식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논의할 의미가 없다. 자신은 피해의식이 없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피해의식이란 논의는 애초에 무의미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우리의 피해의식은 대체로 ‘전의식’적이다. 완전히 ‘의식’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무의식’ 속에 있지도 않다. 우리의 피해의식은 삶 중간 어디 즈음에서 불시에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곤 한다. “어, 이거 내 피해의식인가?” 살아가다보면 스치듯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는 우리의 피해의식이 어린 시절 가물가물한 친구의 이름처럼 우리의 ‘전의식’에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이 비교적 심한 경우와 비교적 덜한 경우의 차이를 규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피해의식은 ‘전의식’적이다. 즉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있다. 이때 이 ‘전의식’은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어떤 피해의식(전의식)은 ‘의식’보다 ‘무의식’의 영역에 더 많이 걸쳐져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상대적으로 짙은 피해의식으로 드러난다. 또 어떤 피해의식(전의식)은 ‘무의식’보다 ‘의식’의 영역에 더 많이 걸쳐져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상대적으로 옅은 피해의식으로 드러난다. 즉, 우리의 피해‘전의식’이 ‘무의식’과 ‘의식’ 중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느냐가 피해의식의 밀도를 결정한다.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방법은 간명하다. 피해‘전의식’을 ‘무의식’보다 ‘의식’의 영역으로 더 많이 가져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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