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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과 피해의식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넌 공부 잘해서 좋겠다.”
“대신 난 못생겼잖아,”     


 자신의 단점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 유쾌하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단단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이다. 피해의식과 자존감은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피해의식과 자존감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빈약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은 피해의식이 많고 짙은 반면, 단단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은 피해의식이 적거나 옅다. 자존감이 있는 이들은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운 경향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피해의식의 중요한 원인 하나를 밝힐 수 있다. 빈약한 자존감은 피해의식의 중요한 원인이다.  

    

 그렇다면 빈약한 자존감은 왜 피해의식의 원인이 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자존감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다. 누구에게나 ‘밝음’(장점)과 ‘어둠’(단점)이 있다. 이때 빈약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밝음’만을 자신이라 받아들일 뿐, ‘어둠’은 외면하고 회피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어둠’을 외면하고 ‘밝음’만 과대 긍정해서 도달한 허구의 자기긍정 상태를 자신감이라고 한다. 이것이 자신감은 바스라지기 쉬운 자기긍정인 이유다. 자신감 넘치는 이들 중 사소한 문제 부딪혀 과도하게 의기소침해지는 경우가 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사소한 문제가 자신이 외면하고 은폐해왔던, 어둠을 폭로하게 될 때, 넘치던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자존감은 자신감과 다르다. 단단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은 ‘밝음’과 ‘어둠’ 모두를 자신이라고 받아들인다.       


 ‘성희’와 ‘경아’는 모두 팔, 다리는 길고 늘씬한데 데 배가 나왔다. ‘성희’는 늘 자신의 나온 배가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노심초사다. ‘성희’는 옷을 살 때도, 팔‧다리는 부각되면서 배를 감출 수 있는 옷만 산다. 하지만 ‘경아’는 다르다. ‘경아’는 자신의 배를 감추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경아야 넌 날씬해서 좋겠다!” 친구들의 부러움에 경아는 “야, 너가 내 배를 안 봐서 그래”라며 웃으며 말한다. ‘경아’는 길고 늘씬한 팔‧다리만큼 자신의 통통한 배 역시 긍정하고 있다.      



빈약한 자존감은 피해의식의 원인이다.


 ‘성희’의 자존감은 빈약하고, ‘경아’의 자존감은 단단하다. ‘성희’는 자신의 ‘밝음’(팔‧다리)만 긍정하며 자신이라 받아들일 뿐, ‘어둠’(배)는 외면하고 회피하며 자신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반면 ‘경아’는 다르다. ‘경아’는 ‘팔‧다리’ 뿐만 아니라 ‘배’ 역시 긍정하고 있다. 이처럼, 자존감은 자신의 ‘밝음’과 ‘어둠’을 모두 긍정할 수 있는 역량이다. 이제 빈약한 자존감이 왜 피해의식의 원인이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피해의식은 왜 발생하는가? ‘어둠’(외모‧가난‧학벌…) 때문인가? 즉, 그 ‘어둠’ 때문에 상처 받았던 기억 때문에 발생하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모든 ‘어둠’이 피해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긍정하지 못한 ‘어둠’만이 피해의식이 된다. 우리는 다양한 ‘어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어둠’들이 모두 피해의식화 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어둠’ 중 상처가 되는 것은 스스로 긍정하지 못한 ‘어둠’일 뿐이기 때문이다.

      

 못생겼고, 가난하고 학벌이 좋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그 모든(외모‧가난‧학벌)  부분에서 피해의식을 갖게 될까? 그렇지 않다. 자신의 ‘어둠’ 중 스스로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부분만이 피해의식이 된다. 만약 그가 못생겼고,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외모와 학벌은 그의 피해의식이 되지 않는다. 반면 그가 가난하다는 사실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가난은 그의 피해의식이 된다. 


자존감은 자신의 ‘어둠’을 긍정하는 역량이다.

 이제 우리는 단단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이 왜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자존감이 튼튼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어둠’을 긍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자존감의 튼튼함은 자신의 ‘어둠’을 긍정하는 크기와 비례한다. 그러니 튼튼한 자존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어둠’은 이미 ‘어둠’이 아닌 셈이다. 이것이 단단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이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다.      


 ‘성원’은 뚱뚱하고 가난하고 전문대를 나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어둠’들을 긍정하고 있다. 누군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뚱뚱하면 연애 못하는 거 아니야?” “가난한 건 게으른 거 아니야?” “전문대 나오면 사람 취급 받기 어렵지 않아?” ‘성원’은 그 말에 피해의식에 휩싸여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까? 아니다. 유쾌하진 않겠지만, 감정적 동요 때문에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는 않을 테다. 오히려 “그건 네 편견이지 않을까?”라며 웃으며 여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단단한 자존감이 있으면 우리는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런 튼튼한 자존감을 갖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자존감은 역량이다. 어떤 역량인가? 있는 그대로(밝음과 어둠)의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역량이다. 이 역량은 쉬이 형성되지 않는다. 자존감이 쉽게 만들어지는 역량이었다면, 자신감에 목을 매는 그 많은 이들은 이미 사라졌을 테고, 세상의 그 많은 피해의식 역시 이미 다 사라졌을 테다. 그만큼이나 자존감은 형성하기 어려운 역량이다. 자존감의 어려움은 ‘밝음’이 아니라 ‘어둠’에 관계해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누가 자신의 ‘밝음’에 대해서 긍정할 수 없을까. 문제는 ‘어둠’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자신의 ‘어둠’이라 여기는 것들을 긍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존감을 형성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자존감은 다시 이렇게 정의내릴 수도 있다. 자신의 ‘어둠’을 긍정하는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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