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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사랑받지 못한 상처다.

상처받은 기억은 피해의식을 결정하지 못한다.


안전바가 내려가지 않았다. 놀이기구를 타려고 한 참 들떠 있던 친구들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내 허벅지 때문이었다. 너무 뚱뚱해서 안전바가 허벅지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지만 그 기억은 생생하다. 그만큼이나 그 일은 내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그뿐일까? 부모에게 선생에게 뚱뚱하다고 크고 작은 핀잔과 비난을 받은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모든 일은 상처가 되어 내 마음 한 켠에 쌓였다. 그렇게 뚱뚱함은 나의 피해의식이 되었다.  

    

 피해의식은 무엇인가? 상처 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이것이 앞서 논의한 피해의식의 일반적 정의다. 뚱뚱함에 대한 나의 피해의식은 피해의식의 일반적 정의에 부합된다. 나는 뚱뚱함 때문에 이런저런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해서 과도하게 나를 방어하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의 이 일반적 정의는 옳다.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네 삶에 존재하는 피해의식을 온전히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선빈’은 뚱뚱하다. 그로 인해 크고 작은 상처들 역시 많이 받았다. 하지만 피해의식은 거의 없다. “너 너무 뚱뚱한 거 아니야?” 친구들의 말에 “좀 그런 면이 있지”라며 웃으며 대답할 수 있을 만큼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선빈’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피해의식이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발생하는 것이라면, 둘의 차이는 설명할 길이 없다. 상처받은 기억은 피해의식의 촉발원인일 뿐, 결정원인은 아니다. 즉,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과도한 자기방어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촉발과 결정


 상처받은 기억은 피해의식을 '촉발'할 수 있을 뿐,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피해의식을 결정하는가? 독사와 젖소가 있다. 둘은 똑같은 물을 마시지만 독사가 마신 물은 독이 되고, 젖소가 마신 물은 우유가 된다. 이 자명한 자연현상은 우리의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침 출근길에 차가 막힌다고 해보자. 어떤 날은 짜증을 내며 경적을 울리고, 어떤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음악을 켤 수도 있다. 같은 마주침(차 막힘)이 발생했는데, 왜 이렇게 다른 반응(경적-음악)을 하게 되는 걸까?     

 

 특정한 마주침은 반드시 우리에게 어떤 사태를 '촉발'한다. 하지만 그 마주침이 특정한 사태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마주침으로 인해 '촉발'된 사태의 양태를 '결정'하는 것은 내적 조건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독사든, 젖소든 물을 먹으면 반드시 어떤 것이 '촉발'된다. 그런데 그 '촉발'된 것이 독일지, 우유일지를 '결정'하는 것은 독사라는 신체조건, 젖소라는 신체조건이다.      


 우리의 마음 역시 그렇지 않은가? 차가 막히면 반드시 우리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촉발'된다. 하지만 그 감정의 양태가 ‘경적’일지 ‘음악’일지는 그 날 그 사람의 내면의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쉽게 말해, 그가 그날 기분이 나쁜 조건이라면 ‘경적’이라는 양태로 결정되고, 좋은 조건이라면 ‘음악’이라는 양태로 '결정'된다. 이 자명한 자연현상으로 피해의식의 작동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피해의식은 사랑받지 못한 상처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 상처는 반드시 어떤 마음 상태를 '촉발'한다. 하지만 그 마주침이 반드시 피해의식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 피해의식으로 '결정'된다 하더라도, 같은 밀도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즉, 같은 상처를 받아도, 어떤 이는 피해의식으로 '결정'되기도 하고 '결정'되지 않기도 한다. 또 그 상처가 피해의식으로 결정되더라도, 그 밀도에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피해의식 혹은 피해의식의 밀도를 결정하는 내면적 조건은 무엇일까? 다시 ‘선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선빈’은 뚱뚱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던 크고 작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피해의식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선빈’은 사랑받기 때문이다. ‘선빈’의 부모는 늘 ‘선빈’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그 사랑은 뚱뚱한 ‘선빈’이 피할 수 없었던 수많은 상처(비난)들이 '촉발'한 어떤 감정들이 피해의식으로 '결정'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렇다. 사랑이다. 피해의식을 '결정'하는 내면적 조건은 사랑 받은 마음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상처는 우리에게 어떤 마음 상태를 '촉발'한다. 하지만 그것이 피해의식이 될지 아닐지는 우리의 내면적 조건, 즉 충분히 사랑받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된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크고 작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이 없거나 옅다. 반대로 사랑 받은 적이 없거나 적은 이들이 크고 작은 상처와 마주칠 때 피해의식이 휩싸이게 된다.

       

 피해의식은 '상처 받은 기억으로 인한 자기방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실제 우리네 현실에서는 조금 수정되어야 한다. 피해의식은 '사랑받지 못한 기억으로 인한 자기방어'다. 피해의식은 그 자체로 상처다. 그 상처는 피해 받았다는 상처라기보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상처다. 많은 사랑을 받은 이는 큰 상처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에서 자유롭지만, 적은 사랑을 받은 이는 작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에 휩싸이게 되니까 말이다. 피해의식과 사랑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니 피해의식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해서 고찰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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