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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기 위해 사랑하기!

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자존감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자존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자신의 어둠을 긍정하는 역량)’이다. 또 하나 정의가 있다.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이 두 정의는 하나의 실체(자존감)를 설명하는 다른 표현이다. 쉽게 말해, ‘자신의 어둠을 긍정하는 역량=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낯선 도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존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둠’이다. 그것을 긍정할 역량이 없어서 자존감이 빈약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어둠’을 긍정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자신의 ‘어둠’을 긍정할 수 있는 역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랑이다. 더 정확히 말해,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문석’은 키가 작다. 작은 키는 분명 ‘어둠’이지만, ‘문석’은 그것을 긍정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부모, 친구, 연인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어둠’을 긍정하지 못할까?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의 ‘어둠’이 드러났을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어둠’을 긍정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그 어둠이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것이다. 자신감은 그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해 찾게 되는 허구의 자기긍정상태인 셈이다. 그러니 자신감은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의 허구의 자기긍정상태.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지냈던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어둠’에 대해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당당함은 바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은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온다. 그 확신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으로부터 온다.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 많으면, 자신이 어떤 모습이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무의식적 확신이 생긴다. ‘문석’이 자신의 ‘어둠’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분명히 있어!” 이런 확신은 그대로의 자신의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으로부터 온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기!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을 알 수 있다. 바로 자존감을 단단하게 만들면 된다. 즉, 자신의 ‘어둠’을 긍정할 수 있는 역량을 쌓으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존감은 드물고 귀한 역량이다. 그것은 능동적 역량이 아니라 수동적 역량이기 때문이다. 즉, 자존감은 혼자 스스로 쌓을 수 있을 역량이 아니다. 자존감은 혼자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행을 한다고 생기는 역량이 아니다. 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에게 깊은 사랑을 받아야지만 생기는 역량이다.

     

 자존감이 수동적 역량이라면, 그 역량을 함양하기 위해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존감은 수동적 역량이지만, 그 역량을 위해서는 능동적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받기 위해서 먼저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그때 그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해줄 수 있다. 그 되돌려 받은 사랑이 쌓일 때 우리의 자존감은 점점 튼튼해져간다. 그렇게 튼튼해진 자존감이 피해의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준다. 이것은 책에 나오는 공허한 이론적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을 온 몸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여드름 난 피부와 뚱뚱한 외모가 싫었다. 그 어둠이 싫어서 피부과를 다니고 매일 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 ‘어둠’을 결코 긍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것은 피해의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 나름으로 그 친구를 사랑해주려 애를 썼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그 친구는 나를 사랑해주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거울 앞에 서서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나의 여드름과 뱃살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나의 여드름과 뱃살을 사랑스럽게 만져주며 말했다. “여드름도 뱃살도 다 예뻐.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뭔지 모를 울컥함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깊은 사랑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나의 여드름과 뱃살이 예전처럼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것들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외모에 관한 피해의식 역시 점점 옅어져갔다.

      

 서글픈 삶의 진실이 있다. 피해의식에 자주 잠식당하는 이는 사랑받은 기억이 합이 적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삶의 진실은 절망적 진단이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의 희망적 전망을 열어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깊은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피해의식 역시 점점 더 옅어질 수 있다.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있다. 사랑 받기 위해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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