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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뿌리, 기쁨의 독점!

피해의식이 유발하는 가장 큰 불쾌함


“왜 나만 이렇게 일을 많이 해야 해” 


‘인철’은 일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직장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항상 더 많은 업무를 하느라 피해를 보고 있다고 여긴다. 그 때문에 직장에서 크고 작은 문제로 마찰과 갈등이 일어나곤 한다. ‘인철’은 왜 피해의식이 생겼을까? 과도한 업무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늦은 밤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을 하며 받았던 상처 때문이다. 과도한 업무 때문에 피해의식이 생겼지만, ‘인철’을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업무량이 아니다.      


 “그건 네 피해의식 때문이지” 회의시간에 업무량으로 언쟁을 하고 있을 때, 선배가 ‘인철’에게 말했다. ‘인철’은 선배의 그 말에 참을 수 없는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꼈다. 이는 비단 ‘인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피해의식은 특정한 상처가 반복(과도하고 부당한 업무)되려할 때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적 동요는 다른 때에 발생한다. 그것은 상대가 자신의 피해의식을 지적할 때이다.      


 “그건 네 피해의식이지.” 이 말은 왜 더 큰 감정적 동요(불쾌함‧불편함)를 불러일으킬까? 두 마음 상태가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수치심과 분노이다. 누군가 우리의 피해의식을 지적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 수치심이 무엇인가? 자신이 감추고 싶었던 부분이 드러날 때 느끼게 되는 부끄러운 마음이다. 누구에게나 피해의식은 감추고 싶은 부분이다. 그러니 누군가 우리의 피해의식을 지적하여 그것을 폭로하려 할 때 수치심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이 수치심이 피해의식이 유발하는 감정적 동요의 한 축이 된다. 하지만 피해의식에서 이 수치심보다 더 중요한 마음 상태가 있다.  


    

피해의식을 지적받을 때 왜 ‘분노’하는가?

 

 바로 분노다. 누군가 우리의 피해의식을 지적하면 분노를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 “그건 네 피해의식이지”라는 말은 “그건 모두 네 책임이지”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인철’은 일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즉, 자신이 동료들에 비해 부당하게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 새로운 업무를 받을 때마다 억울하고 짜증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억울하고 짜증이 나는 것은, 그 모든 마음이 자신 탓이라고 규정당할 때다. 그때 억울함과 짜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된다.

       

 우리는 언제 분노하게 되는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때? 아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비난받게 될 때 깊은 분노심이 치밀어 오른다. 누군가에게 피해의식을 규정당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그건 네 피해의식 때문이지” 이 말은 우리의 피해의식이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라고 단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바로 이 때 발생하는 분노가 피해의식이 유발하는 감정적 동요의 한 축이다. 그런데 이 분노에는 조금 더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분노에는 정당한 분노가 있고, 부당한 분노가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묻자. 피해의식은 내 책임인가? 달리 말해, 피해의식을 지적당할 때 느끼게 되는 분노는 정당한 마음 상태인가? 아니면 부당한 마음 상태인가? 만약 피해의식이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라면 그 분노는 부당한 마음이다.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인 일에 책임을 묻고 비난 받는 것은 분노할 일이 아니다. 반성해야 할 일이지. 반대로, 피해의식이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 분노는 정당한 마음이다. 우리의 잘못이 아닌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거나 비난을 받을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마음이니까 말이다. 



피해의식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피해의식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오롯이 그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피해의식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있을 수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는 일견 옳은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인철’과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면서 (일에 대한) 피해의식이 없거나 덜 한 이들도 분명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은 정말 모두 한 개인의 책임인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 피해의식을 규정당할 때 느끼게 되는 분노는 정당하다. 즉, 우리에게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물어보자. 세상의 모든 피해의식은 왜 생기는 걸까? 일부 계층의 ‘기쁨의 독점’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쁨을 추구한다. 하지만 누구나 기쁨을 충분히 누릴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진 일부 계층이 기쁨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다종다양한 피해의식은 근본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발생한다.



피해의식은 ‘기쁨의 독점’ 때문에 발생한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을 예로 들어보자.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외모 탓으로 돌리고, 자신보다 더 나은 외모를 갖고 이는 이들에게 과도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이가 있다. 그는 왜 이런 피해의식을 갖게 된 걸까? 단순히 그의 마음이 삐뚤어졌기 때문인가?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말하는 오류에 불과하다. 마음이 뒤틀어져서 피해의식이 생긴 게 아니라, 피해의식 때문에 마음이 뒤틀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 피해의식은 왜 발생했을까? 외모가 아름다운 이가 기쁨(인정‧칭찬‧관심)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일종의 권력이다. 그 권력으로 ‘기쁨의 독점’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그 반작용으로 받은 피해(폄하‧비난‧무관심) 때문에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예쁜 아이가 예쁘다는 이유로 온갖 인정‧칭찬‧관심을 독점할 때 못생긴 아이는 폄하‧비난‧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처를 받고 자란 아이가 어떻게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이 뒤틀어져서 피해의식이 생긴 게 아니라, (일부 계층이 기쁨을 독점한 결과로 피할 수 없었던 상처 때문에 발생한) 피해의식 때문에 마음이 뒤틀어진 것이다. 기쁨의 독점! 이것이 피해의식의 근본적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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