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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사회적 문제다.

부정적 감정은 어떻게 자기파괴적이  되는가?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피해의식은 분명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적이다. 하지만 그 피해의식을 발생시키는 작동원리는 이미 지극히 사회적이다. 그러니 피해의식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특정한 권력을 가진) 일부 계층이 기쁨을 독점하는 사회라고 답해야 정당하다. 우리의 피해의식에는 사회적 문제가 이미 깊이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 자체가 우리의 피해의식을 옅어지게 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분노‧짜증‧우울…)들이 있다. 그 감정들은 언제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가? 그 부정적인 감정들 자체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자기부정에 이를 때다.  내 속에 있는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 정당하지 않은 감정이라고 여길 때 우리는 서서히 파괴된다. 분노‧짜증‧우울이 쌓여가지만, 그 모든 부정적 감정이 나의 잘못인 것만 같을 때 말이다. 쉽게 말해, 화가 날 때 화를 내면 영혼이 파괴되지 않지만, 화가 날 때 화가 난 자신을 부정할 때 우리의 영혼이 파괴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그것은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 자신의 문제로부터 기인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다보면 분노하고 짜증나고 우울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 건강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분노‧짜증‧우울이 우리의 영혼을 파괴할 정도는 아니다. 그 부정적 감정들이 모두 자신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여길 때 우리의 영혼은 파괴된다. 자신에게 닥친 모든 불행의 원인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믿게 될 때 영혼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이 자기부정이 될 때

      

 피해의식 역시 그렇다. 피해의식은 분명 삶에 이러저런 문제들을 야기한다. 피해의식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피해의식 자체가 우리 영혼을 파괴할 만큼 유해한 것은 아니다. 피해의식이 심각할 정도로 유해해질 때는 그 피해의식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게 될 때다. “피해의식은 내가 모자라서 생긴 거지” 이런 마음은 피해의식을 더욱 증폭한다. 그렇게 증폭된 피해의식은 어느 순간 우리의 영혼을 파괴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직장 안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분노, 짜증, 우울을 잘 다루는 법은 무엇인가? 그 부정적인 감정이 ‘나’(개인)의 문제와 ‘직장’(사회)의 문제 모두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또 더 나아가 그 부정적인 감정 중 어느 부분의 어느 만큼이 ‘나’의 문제 때문에 발생했고, ‘직장’의 때문에 발생했는지를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직장 안에서 겪게 되는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 다룰 수 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은 성찰해서 바꿔나가면 되고, 직장의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그것이 안 되면) 부당하게 자신을 탓하지 말고 정당하게 분노하면 되니까 말이다.       


 우리에게는 갖가지 피해의식이 있다, 그것을 잘 다루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이 전적으로 ‘나’의 문제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 모두에서 기인했다. 어떤 피해의식이든,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가 뒤엉켜 발생했을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의 피해의식 중 어느 부분의 어느 만큼이 개인적인 문제였는지 또 사회적인 문제였는지를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피해의식 때문에 겪게 되는 많은 부정적 감정들을 잘 다룰 수 있다. 피해의식 중 ‘나’의 문제로 기인한 부분은 스스로 성찰해보면 되고, 사회적인 문제로 기인한 부분은 그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부당하게 자신을 탓하지 말고 정당하게 분노하면 되니까 말이다. 나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 사이에 절묘한 균형감각을 찾을 수 있을 우리는 피해의식을 훨씬 지혜롭고 다룰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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